“실패해도 좋다, 죽을 각오로 뛰어라”
선수단에 공격적 주루플레이 주문
두려움·망설임→자신감으로 전환

LG그룹 치명타에 야구단 ‘암흑기’
신구 조화 갖추며 승부근성 중무장
“이번 우승은 시작…왕조 구축할것”

지난 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kt에 6-2로 승리하며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LG 선수들이 염경엽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kt에 6-2로 승리하며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LG 선수들이 염경엽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엘지(LG) 우승의 첫 단추는 도루였다. 염경엽 감독은 시범 경기 때부터 엘지트윈스 선수들에게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주문했다. 무리할 정도였다. 가뜩이나 염경엽 야구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팬들은 무리해 보이는 엘지의 주루 플레이에 불만이 컸다.

염경엽 감독은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야말로 엘지트윈스의 체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봤다. 주루에서 주자가 살려고만 하면 결국 점수도 내지 못하고 이닝이 끝나고 죽게 된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것이다.

사실 이건 염경엽 감독이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 시절 살아남기 위해 배운 철학이었다. 염경엽 감독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 유격수로 입단했다. 저조한 타격 실력 탓에 1995년부터 유격수 주전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1996년엔 신인 후배한테 완전히 주전 자리를 빼앗겨버렸다. 야구장 전광판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걸 발견한 염경엽 감독은 라커룸 화장실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프로 입단 5년 만에 벤치 신세로 전락하자 야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캐나다 이민을 떠나려고 영주권 심사를 받았다. 그마저도 탈락해버렸다. 1995년 시즌에서 염경엽 감독은 대주자로서 야구장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대주자로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1루라도 더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야 나도 살고 팀도 살았다. 2000년 은퇴할 때까지 그렇게 5년을 더 그라운드에서 버텼다.

2022년 11월 엘지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한 염경엽 감독은 라커룸을 비롯한 이곳저곳에 이런 글귀를 붙여놓았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나의 최고의 적이다.” 그리고 그라운드 위에서 염경엽 감독이 선수들의 두려움과 망설임을 없애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공격 주루였다. 선수 시절 자신의 선수 생명을 연장시켜줬던 길이었다.

염경엽 감독이 엘지트윈스의 문제가 두려움과 망설임이라고 봤던 이유가 있었다. 엘지트윈스는 승리할 실력이 되는데도 승리 앞에서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팀이었다. 1994년 이후 무려 29년 동안이나 이어져온 엘지트윈스의 좌절은 두려움과 망설임 때문이었다. 염경엽 감독은 엘지트윈스의 팀문화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패배와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을 승리와 우승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바꿔야만 했다.

그 방식 중 하나가 공격 주루인 건 처음으로 프로구단의 사령탑으로서 넥센 감독이 됐던 2012년에도 스스로 입증한 방식이었다. 넥센 히어로즈는 2012년 179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면서 팀도루 1위에 올랐다. 넥센 간판 선수인 박병호와 강정호는 20홈런에 20도루라는 20/20클럽을 달성했다.

2023년 시즌 엘지트윈스의 도루성공률은 62.2%에 달한다. 이렇게 그라운드에서 과감해지면서 팀을 짓누르고 있던 두려움과 망설임도 사라졌다. 덕분에 2023년 정규 시즌에서 엘지트윈스가 거둔 86승 가운데 42승이 역전승이 됐다.

염경엽 감독이 꼽는 한국시리즈의 진짜 승부처는 2차전이다. 1차전에서 승리한 케이(KT)의 상승세를 꺾어냈기 때문이다. 팽팽하던 경기가 엘지트윈스쪽으로 기운 건 6회 초 무사 1루에서 터진 박동원 선수의 2점 홈런이었다. 사실 염경엽 감독은 엘지트윈스가 정규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뒤 사비로 박동원 선수에게 패넌트레이스 우승 선물을 줬다. 현금 1000만원이었다. 동기부여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던 자리는 자신감과 동기부여로 채워졌다. 박동원 선수는 염경엽 감독에게 승부처 역전 홈런으로 보답했다.

故 구본무 회장의 각별한 야구사랑

엘지트윈스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 긴 암흑기를 보냈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라이온즈한테 무너진 게 결정타였다. 9회 말 이승엽 선수와 마해영 선수한테 역전 홈런과 끝내기 홈런을 맞고 우승 문턱에서 무너져버렸다. 그전까지 엘지트윈스는 늘 우승 후보로 꼽히는 강팀이었다. 2003년부턴 만년 하위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2003년부턴 축구의 인기가 야구의 인기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엘지트윈스의 암흑기는 프로야구의 비수기와 일맥상통했다. 프로야구 구단들은 만년 적자다. 모회사의 지원이 없으면 독자생존이 어렵다. 프로야구단은 기업 입장에서 보면 마케팅 수단이다.

염경엽 감독은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야말로 엘지트윈스의 체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봤다.
염경엽 감독은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야말로 엘지트윈스의 체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봤다.

2000년대부턴 프렌차이즈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프로야구단의 쓸모도 줄어들게 됐다. 프로야구단을 보유한 기업들이 내수에서 수출로 중심축을 옮겼기 때문이다. 그건 엘지트윈스의 모회사인 엘지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벌 삼성전자처럼 모바일과 전자와 가전에서 엘지그룹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완벽한 글로벌 회사로 거듭났다.

그렇다고 엘지그룹이 엘지트윈스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했던 건 아니었다. 엘지트윈스의 초대 구단주인 고 구본무 엘지그룹 회장의 야구 사랑은 각별했다. 1998년 해외 출장길에 사비로 코리안시리즈 우승 MVP한테 전달해달라고 8000만원 짜리 롤렉스를 구매해 왔을 정도였다. 정작 1998년 엘지트윈스는 준우승에 머물렀다.

1998년은 엘지그룹과 구본무 회장한테도 쓰라린 한 해였다. 외환위기로 인한 빅딜에서 애지중지하던 엘지반도체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 이후 구본무 회장은 반도체 빅딜을 주관한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탈퇴하고 다시는 걸음하지 않았다.

가을야구 앞에만 서면 작아진 LG

2003년엔 엘지카드 사태도 타격이 컸다. 엘지카드는 길거리 영업으로 카드를 남발해주다가 결국 2003년 11월 단기 유동성 위기에 빠진다. 엘지반도체는 억울할 수도 있었다. 엘지카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엘지반도체는 하이닉스가 됐고 엘지카드는 신한카드가 됐다.

그렇게 반도체와 금융의 핵심 계열사를 차례로 잃은 엘지그룹은 전자 분야에 집중했다. 모바일과 가전만이 엘지의 살 길이었다. 그런데 2009년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본격화된 스마트폰 혁명은 엘지그룹한테 치명타를 가했다. 당시 엘지그룹도 스마트폰 혁명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다만 떠오르는 안드로이드폰 대신 지는 해인 MS폰에 집착한 게 패착이었다. 노트북OS의 파트너였던 마이크로소프트에 의지했지만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마저 구글한테 밀리면서 무너져버렸다. 엘지그룹은 뒤늦게 구글과 안드로이드폰을 개발했지만 이미 한 발 늦은 뒤였다. 엘지트윈스의 암흑기는 사실 엘지그룹의 암흑기였다.

엘지트윈스가 정규리그 2위로 오르면서 마침내 하위권에서 탈출한 건 2013년이었다. 2013년 엘지트윈스의 연간 관객수는 128만명에 달했다. 10년 암흑기의 탈출을 학수고대해온 엘지팬들이 그만큼 많았단 의미였다. 엘지트윈스는 프로야구 10개팀 중에서도 가장 팬층이 두텁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야구의 비수기이자 엘지트윈스의 암흑기인 2000년대에도 당시 프로야구 8개팀 가운데 유일하게 연 평균 관중 1만명대를 유지했다. 당시 연간 프로야구 관중수 70만명 가운데 30%가 엘지트윈스팬이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엘지트윈스는 2세대 프로야구팬을 상징하는 팀이다. 1980년대 프로야구 팬덤은 지역주의가 강했다. 광주 해태타이거즈와 부산 롯데자이언츠의 대결은 지역감정과 결합되면서 전쟁을 방불케했다.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선발 맞대결을 그린 2011년 영화 <퍼펙트게임>이 바로 그 얘기다.

1990년 엘지그룹이 MBC청룡을 인수하면서 엘지트윈스가 창단되자 프로야구 팬덤은 지역중심에서 세대중심으로 서서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광환 감독이 주도한 신바람 자율 야구는 1994년 우승으로 결실을 맺었다. 당시 20대 전후였던 X세대라고 불리는 1970년대생 세대가 대거 엘지트윈스 팬덤으로 유입됐다.

여기에 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이라는 실력과 외모까지 겸비한 야구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여성 야구팬도 늘어났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에서 일어났던 일이 1990년대 프로야구와 엘지트윈스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2013년 엘지트윈스의 부활은 그런 엘지트윈스 세대성별 팬덤을 한 곳으로 모으는 구심력이 됐다. 정작 엘지트윈스는 암흑기 탈출에는 성공했을지도 몰라도 우승을 하기엔 부족한 팀이었다. 원인은 두려움과 망설임이었다. 정규 리그에서 상위권에 올라도 가을 야구에선 맥을 못췄다. 2014년 4위까지 올랐다가 2015년엔 9위로 곤두박질쳤다.

특히 2015년은 시즌 개막부터 마감까지 내내 9위에 머물렀던 해였다. 숨겨진 원인은 우승에 대한 강박이었다. 류중일 감독은 선수와 코치와 감독으로 삼성라이온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우승 청부사였다. 후임 류지현 감독은 평생을 엘지트윈스에 몸 담았던 프렌차이즈 스타였다. 정작 류중일 감독과 류지현 감독은 모두 재계약에 실패했다. 우승을 못하면 더 이상 기회도 없었다. 우승을 못하면 올시즌은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그래서 2022년 엘지트윈스가 염경엽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정했을 때도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염경엽 감독은 우승 경험이 없는 감독이었다. 2012년 넥센을 시작으로 SK의 감독이 됐지만 준우승에 머물렀거나 시즌 중간에 사퇴했다. 사실상 2년 동안 야인이었다. 우승 경험이 없는 감독한테 엘지트윈스의 우승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로 보였다.

내 안의 두려움이 우승 걸림돌

그런데 염경엽 감독과 엘지트윈스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염경엽 감독은 2년 동안 쉬면서 지난 20년 동안 운영팀 매니저와 코치와 감독으로서 자신의 리더쉽을 복기한 리더쉽 노트를 만들었다.

스마트폰에 저장해놓고 매주 한번씩 다시 읽으면서 자신을 되돌아봤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로 삼은 것이다. 엘지트윈스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 차명석 단장 체제 이후 엘지트윈스는 팀리빌딩이 어느 정도 끝난 상태였다.

트레이드 실패도 있었지만 결국 신구 조화를 갖춘 팀으로 거듭났다. 오지환이 끌고 고우석이 미는 팀이 된 것이다. 이제 필요한 건 2% 부족한 승부근성을 채우는 것이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이라는 최고의 적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자신부터 이겨놓으면 상대팀도 이길 수 있었다.

11월 10일 열렸던 한국시리즈 3차전은 엘지트윈스가 어떤 팀이고 염경엽 야구가 어떤 야구인지 제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야구 역사상 길이 남을 명승부로 평가받는 지난 한국 시리즈 3차전도 엘지트윈스의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8회 말 케이티위즈 박병호 선수의 역전 2점 홈런으로 뒤집혔던 경기를 9회 초 엘지트윈스의 오지환 선수가 역전 3점 홈런으로 다시 뒤집었다. 9회 말 1사 만루로 몰리면서 다시 역전 위기에 몰렸지만 엘지트윈스 선수들은 투지를 불태웠다.

염경엽 감독은 “야구에는 흐름이 있다”고 강조한다. 매달마다 경기마다 이닝마다 흐름이 바뀐다. 한국 시리즈 5차전이 끝난 직후 우승 소감에서 염경엽 감독이 “이번 우승이 끝이 아닐 것”이라며 “왕조를 만들겠다”고 말한 이유다. 엘지트윈스 가을야구를 상징하는 유광점퍼는 지난해보다 300% 넘게 팔렸다. 분명 바람은 엘지트윈스를 향해 불고 있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