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업계 고정관념 깬 정유경 회장
“백화점 본질은 공간 경험” 줄곧 강조
강남·명동점, 경험플랫폼으로 변신
‘비욘드 신세계’로 디지털 주권 확장
MZ 경영진으로 교체, 트렌드 주도
내달 청담점 오픈, ‘독립브랜드’시동
성장 속도보다 효율화가 향후 과제

정유경 ㈜신세계 회장은 2024년 10월 30일 취임과 동시에 그룹의 축을 재배치했다. 백화점 부문은 ‘공간 혁신’으로, 조직은 ‘책임과 보상’ 규율로, 포트폴리오는 온·오프라인 투트랙으로 다시 짰다. 1년이 지난 2025년 11월 12일 현재, 강남·명동의 매출 곡선과 고객 체류시간의 변화는 이 전략이 단순한 리뉴얼이 아닌 ‘신세계 리빌딩’임을 보여준다.
오프라인 유통의 구조적 역풍 속에서도 “쇼핑만 한다면 누가 백화점에 오겠는가”라는 반문을 매출로 증명한 것이다. 정유경 회장은 1970년대생 여성 총수로서 그는 한국 유통 산업의 세대 전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감각적 리더십으로 출발했지만, 1년 만에 구조 개편과 디지털 전환을 병행하며 ‘감성에서 시스템으로’ 옮겨간 행보는 재계의 고정 관념을 깼다.
강남에서 증명한 공간 혁신
지난 1년 신세계는 오프라인의 위기를 공간의 위기로 보면서 발상의 전환을 했던 시기로 집약된다. 정 회장은 줄곧 “백화점의 본질은 공간 경험”이라 강조하며 강남·명동의 체질을 바꿨다. 강남점은 2025년 11월 7일 기준 누적 매출 3조원을 돌파해 3년 연속 3조 기록을 달성했다.
이는 오프라인 유통의 성장률이 평균 2%대에 머무는 상황에서 이룬 독보적 성과다. 리뉴얼 이후 주말 기준 일평균 방문객은 10만명을 넘었고, 매출은 20% 이상 증가했다. 디저트 전문관 ‘스위트파크’는 누적 방문객 1200만명, 매출은 전년 대비 108% 증가를 기록했다.
‘하우스 오브 신세계’는 1년 만에 141% 성장했다. 식품관 중심의 F&B 재편이 백화점의 실적을 견인한 셈이다. VIP 매출 비중은 52%로 처음 절반을 넘어섰고, 외국인 매출은 전년 대비 71% 이상 늘었다. 정 회장의 전략은 단순한 인테리어 리뉴얼이 아니라 소비자 심리의 변화를 읽어낸 해석이었다. 그는 쇼핑을 목적 행동에서 시간의 경험으로 전환시켰다. 강남점의 고객 동선 재배치, 미식 중심 콘텐츠 강화는 매출 이상의 감성 데이터를 축적하며 신세계의 브랜드 자산 가치를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특히 신세계 명동 본점은 ‘타운화 전략’으로 백화점의 공간적 한계를 넘어섰다. 2025년 4월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더 헤리티지’는 옛 제일은행 건물을 복원해 미술·북 큐레이션·오브제 전시를 결합했다. 11월에는 명품·잡화 중심의 ‘더 리저브’가 공개된다.
내년 7월에는 패션·식음료 중심 신관 ‘디 에스테이트’가 문을 연다. 강남과 명동을 축으로 한 이 ‘투핵 전략’은 체류시간을 늘리고 구매 전환율을 높이는 구조적 효과를 만들었다. 백화점은 더 이상 판매 공간이 아니라 경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명동 일대가 코로나19 이후 침체에서 회복되는 과정과 맞물리면서 신세계는 도심 상권 재생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정 회장이 선택한 ‘타운화’는 매장 확장 이상의 개념이다. 도시의 시간을 백화점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즉 문화와 상업을 연결한 도시 브랜딩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세계의 공간 전략은 도심 유통의 몰락을 늦춘 것이 아니라 도시 소비의 형태를 다시 설계하는 실험이 되고 있다.
여기에 2025년 8월 신세계는 자체 쇼핑 앱 ‘비욘드 신세계’를 출범시켜 백화점 입점 브랜드 2200여개를 모았다. SSG닷컴의 결제·배송 시스템을 연동해 오프라인 감성에 온라인 편의성을 더했다. 이는 단순한 온라인 확장이 아니라 ‘백화점이 직접 만든 디지털 매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같은 달 론칭한 ‘비아 신세계’는 유명 인사와 동행하는 콘텐츠형 여행상품으로 주목받았다. 권오철 작가와 떠나는 아이슬란드 오로라 여행은 출시 직후 완판됐고, 예술·건축·미식 등 주제별 맞춤 여행으로 차별화했다.
이 두 플랫폼은 단순히 판매 채널의 확장이 아니라, 계열분리 이후 신세계의 독립적 데이터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포석이다. 실제 SSG닷컴의 지분은 이마트 45.58%, 신세계 24.42%로 공정거래법상 완전한 분리를 위해선 한쪽 지분을 10% 미만으로 낮춰야 한다. 신세계는 이를 계기로 백화점 내부에 데이터 분석 전담조직을 신설했다. 매출보다 고객 체류 패턴·재방문율·구매 시점 등 정성 데이터를 KPI로 삼은 첫 해였다.
‘비욘드’의 성과는 이런 내부 구조 변화가 뒷받침한 결과였다. ‘비욘드’는 디지털 주권 확보의 시작점이며, ‘비아’는 경험경제 시대에 신세계 브랜드를 생활의 한 장면으로 확장하려는 실험이다.
신상필벌 조직… 성과 중심 세대교체
정 회장은 ‘성과에는 보상, 부진에는 책임’이라는 원칙을 첫 인사에서 구현했다. 2025년 9월 단행된 2026년도 조기 인사에서 전체 임원의 20%를 교체하고, 40대 비중을 16%로 확대했다. 이는 세대교체와 책임경영을 동시에 꾀한 결정이었다.
성과를 낸 박주형 신세계백화점 대표는 사장으로 승진하며 신세계센트럴 대표를 겸직했고, 코스메틱 부문에는 1980년대생 CEO(서민성·이승민)를 전면에 배치했다. 이승민 대표는 그룹 첫 여성 CEO다. 부진한 패션·면세 부문은 리더십을 교체했다.
상반기 39억원 적자를 낸 신세계디에프에는 이석구 대표를 선임했고, 신세계인터내셔날은 패션·코스메틱1·코스메틱2·자주 등 4인 각자대표 체제로 세분했다. 1980년대생 리더 중심의 MZ 경영진 교체는 빠른 트렌드 대응을 위한 ‘조직의 체질개선’으로 읽힌다.
동시에 성과주의를 제도화한 이 인사는 신세계의 기업문화가 감각 중심에서 데이터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젊은 리더를 전면에 세운 조직은 트렌드를 예측하는 기업에서 트렌드를 설계하는 기업으로 진화 중이다.
오는 12월 문을 여는 청담 ‘하우스 오브 신세계’는 백화점 외부 첫 독립 점포다. 기존 SSG푸드마켓 청담점을 인수·리뉴얼해 2년 만에 재개장하는 프로젝트로, 체류형 F&B와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결합했다. 청담 트웰브 리퀴숍, 프리미엄 과일 브랜드 청담아실, 자회사 편집숍 맨온더분 등 고급 콘텐츠를 집약해 ‘백화점 밖의 백화점’을 구현한다.
이는 향후 출점 방식이 복합형 랜드마크에서 ‘독립 브랜드’로 확장될 신호탄이다. 신세계가 더 이상 점포 단위의 기업이 아니라 ‘공간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청담점은 단순한 매장이 아니라 신세계의 공간 철학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현장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성과들로 2025년 신세계(별도)는 매출 6조8865억원(전년 대비 +4.8~4.9%), 영업이익 4750억원(-0.4%) 수준으로 전망된다. 강남점 상반기 매출은 1조6947억원, 백화점 전체 상반기 매출은 5조7737억 원(+3.1%)으로, 리뉴얼 투자에도 수익성을 방어했다.
증권가(에프앤가이드)는 올해 3분기 매출 1조6371억원, 영업이익 1068억원(각각 전년 대비 +6.3%, +14.7%)을 예상했다. 그러나 면세와 패션은 구조적 숙제로 남았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상반기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90.2% 감소했고, 뷰티 브랜드 ‘어뮤즈’와 ‘연작’의 성장에도 패션 부문 부진이 발목을 잡고 있다.
면세점 부문은 인천공항 임대료 문제와 중국발 관광수요 정체라는 외생 변수에 묶여 있고, 패션 부문은 글로벌 SPA 브랜드와 K패션 내 과잉 경쟁이라는 내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단순 경영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구조적 리스크가 수익성을 제약하는 구도다. 요컨대 공간 혁신이 매출을 증명했다면, 사업 포트폴리오의 균형은 이제 리스크 관리의 관문이다.
2025년 5월 30일 이명희 총괄회장이 ㈜신세계 지분 10.21%를 정 회장에게 증여하면서 계열분리의 큰 틀은 완성됐다. 그러나 SSG닷컴·신세계 의정부역사 등의 공동 지분 정리와 공정거래위 심사를 거쳐야 완전 분리가 가능하다. ‘신세계’ 브랜드 명칭의 귀속 문제도 남아 있다.
계열분리 완주와 수익성의 규율
앞으로 필요한 것은 확장보다 ROIC 규율이다. ROIC(Return on Invested Capital, 투하자본이익률)은 단순한 매출 성장률이 아닌, 투입한 자본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익을 만들어내는지를 측정하는 지표다.
따라서 신세계의 랜드마크 전략이 장기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오픈 효과 이후의 수익성을 체계적으로 측정해야 한다. ㎡당 운영이익, 고객 생애가치(CLV)와 체류시간, 디지털 전환의 전환율·배송원가 등 핵심 지표를 KPI로 묶는 내부 통제 시스템이 필요하다. 성장의 속도보다 효율의 정밀도가 신세계의 다음 성장을 좌우할 시점이다.
정유경의 1년은 ‘뉴 신세계 구축기’였다고 할만큼 숨 가쁘게 이어져 왔다. 공간 혁신과 플랫폼 전환, 조직의 세대교체로 백화점의 체질을 바꿨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지속 가능한 수익의 구조화다. 강남·명동의 타운화 전략은 고객을 도시로의 시간으로 붙잡았고, 12월 청담에서 열리는 하우스 오브 신세계는 그 브랜드 세계관을 백화점 밖으로 확장하는 실험이다.
면세·패션의 회복, 계열분리의 완주, 그리고 수익성 규율이 더해질 때 정유경의 리더십은 ‘공간이 매출을 만든다’는 개념을 넘어서 ‘공간이 이익을 만든다’는 명제로 완성될 것이다. 이처럼 정유경의 리더십은 이제 ‘공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감각의 경영을 넘어, 숫자와 데이터를 통제하는 이성의 경영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것이 정유경 회장이 앞으로 만들어갈 두번째 신세계다.
- 김기연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