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 그리는 정의선, 한국제조 지켜낼까
협력사가 낸 대미 관세 전액 소급 지원
피지컬AI·로봇 파운드리 구상 급물살
노하우 부족한 中企로봇 대신 생산도

자율주행 고도화·수소AI신도시 추진
부품사 “숨통 트였지만 관세폭탄 상존”
中企참여 방식이 현대차 성패 가를듯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11월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11월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5년 125조2000억원 국내 투자’ 계획은 숫자만 보면 분명 파격이다. 직전 5년(2021~2025년) 동안 국내에 투입한 89조1000억원보다 36조1000억원을 더 쓰겠다는 선언이고, 연 평균으로 환산하면 17조8000억원에서 25조원 수준으로 40% 넘게 늘어난다.

시점도 의미심장하다. 미국의 25% 관세 충격이 중소 부품사들을 옥죄는 와중에 현대차그룹은 1차 협력사가 2025년에 실제 부담한 대미 관세를 소급해 전액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관세 폭탄을 ‘일단 한숨 돌리게’ 해주면서 한국을 전기차·수소·로봇의 마더 팩토리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동시에 꺼낸 셈이다.

 

부품협력사 R&D 적극 지원

투자 구조를 뜯어보면 방향은 더 뚜렷해진다. 125조2000억원 가운데 50조5000억원은 AI·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전동화·로보틱스·수소 등 이른바 미래 신사업에 들어간다. 38조5000억원은 연구개발(R&D), 36조2000억원은 공장·설비·서비스망 등에 쓰이는 경상투자다.

완성차 판매로 버는 돈을 다시 내연기관 설비에 넣는 선순환 구조는 이미 끝났다. 현대차그룹은 AI 데이터센터·피지컬 AI 애플리케이션 센터·로봇 파운드리·수소 수전해 플랜트·EV·PBV 전용공장에 자금을 쏟아붓는 방식으로 사업 포트폴리오 전체를 재편하겠다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피지컬 AI’라는 단어다. 센서·카메라로 현실 세계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스스로 판단·행동하는 인공지능을 뜻한다. 현대차그룹은 차량 내 인공지능, 자율주행, 공장 설비 자동화, 로봇 운영을 모두 피지컬 AI라는 하나의 궤도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클라우드 상의 AI 데이터센터가 ‘머리’를 담당하고, 로봇·차량·생산 설비가 ‘몸’이 돼 공장과 물류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구조다.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에서 이미 다수의 로봇·자율주행 물류장비·디지털 트윈 관제가 적용되고 있고, 이런 생산 체계를 울산 EV 전용공장과 기아 PBV 전용공장으로 옮겨오겠다는 계획도 세워두었다.

로봇 파운드리 구상도 단순한 신사업 진출이라기보다는 제조 생태계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로 읽힌다. 현대차그룹은 피지컬 AI로 확보한 고객 맞춤형 로봇 기술을 기반으로 ‘로봇 완성품 제조 및 파운드리 공장’을 국내에 짓겠다고 했다. 자사 로봇 라인업을 생산하는 동시에, 제조 노하우가 부족한 중소기업의 로봇을 대신 생산해주는 공장 모델이다.

기존 자동차 부품 협력사에게는 로봇 액추에이터·센서·감속기 등 핵심 부품 연구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자동차 부품에 묶여 있던 포트폴리오를 로봇 부품으로 다각화해 고부가 수출과 부품 국산화를 동시에 노리겠다는 계산이다.

실제 수치도 그 방향을 뒷받침한다. 2025년 3분기 현대자동차의 무형자산 취득액은 1조6751억원으로 전년보다 26.6% 늘었다. 여기엔 차량제어 소프트웨어, 로봇제어 AI 알고리즘, 자율주행·로보틱스 데이터 플랫폼 강화를 위한 지출이 포함된다.

최근 울산사업장에서 열린 ‘이포레스트 테크데이’에서는 4족보행 로봇 ‘스팟’을 활용한 설비 예지정비, 산업용 착용 로봇 ‘엑스블 숄더’의 현장 적용 사례도 공개됐다. 125조 투자 발표와 별개로, 이미 현대차그룹의 재무제표 안에서는 ‘소프트웨어·데이터·알고리즘’이라는 무형자산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급망 관리 등 핵심기능 한국 배치

자율주행과 SDV, 수소 분야 투자도 한 축을 이룬다. 현대차그룹은 엔드 투 엔드 딥러닝 모델 기반 ‘Atria AI’를 전면에 내세워 42dot, 모셔널과 함께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 SDV 전략의 경우, 2026년 하반기 중앙집중형 전기전자(E/E) 아키텍처를 적용한 ‘SDV 페이스카’를 선보이고, 검증을 거쳐 양산차에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OTA 업데이트를 전제로 한 ‘업데이트되는 자동차’로의 전환이다. 수소 분야에서는 차세대 연료전지 시스템과 수소버스·트럭 개발, 서남권 1GW 규모 PEM 수전해 플랜트 건설, 수전해·연료전지 부품의 국내 생산 및 수출 산업화 구상을 동시에 내놓았다. 향후에는 AI·수소·V2X를 결합한 ‘수소 AI 신도시’ 조성까지 검토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 거대한 청사진의 또 다른 축은 ‘마더 팩토리’ 전략이다. 지난 14일, 기아는 경기도 화성 오토랜드에서 전기 PBV 전용 공장인 이보 플랜트 이스트 준공식과 웨스트 기공식을 동시에 열었다. 이스트는 연 10만대, 웨스트는 2027년부터 연 15만대를 생산해 화성 한 곳에서만 연 25만대의 목적기반 차량(PBV)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기아는 이보 플랜트와 컨버전 센터 등에 약 4조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PBV 89만대를 판매하고, 그 중 73%를 해외에 수출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2030년까지 글로벌에서 생산할 기아 전기차 451만대 중 58%인 263만대를 국내에서 생산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현대차 역시 울산에 연 20만대 규모 EV 전용 공장을 2026년초 완공 목표로 짓고 있고, 9300억원을 들여 연 3만기 규모의 수소연료전지 공장을 착공했다.

현대차그룹은 “한국을 전기차 마더 팩토리로 삼고, 해외 공장은 생산 중심 기지로 활용하겠다”고 공언한다. 연구개발과 공급망 관리, 인력 양성 등 핵심 기능은 한국에 두고, 관세·물류비를 고려해 미국·유럽·인도 등에서 생산을 분산하던 전략을 재정렬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 흐름에 맞춰 정책 카드들을 꺼내 들었다. 같은 날 열린 ‘제1차 미래차 산업전략 대화’에서 정부는 자동차산업에 15조원 이상 정책금융을 공급하고, 2026년 전기차 보조금을 9360억 원으로 책정해 전년보다 30% 이상 늘리겠다고 했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에는 별도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설계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2035년에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자동차 10대 중 8대를 친환경차로 만들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현대차그룹의 마더 팩토리 전략과 정부의 미래차 산업정책이 맞물린 형태다.

그러나 숫자와 선언이 현장을 곧바로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중소 부품업계 입장에서 보면 이번 패키지는 ‘숨통이 트였다’는 평가와 함께 여전히 적지 않은 숙제를 남긴다. 우선 관세 문제를 보자.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의 미국 수출액은 약 82억2200만달러(11조7000억원)였다. 여기에 25% 관세를 적용하면 연간 20억5550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2조9000억원 규모의 부담이 발생한다. 현대차그룹이 2025년 한 해 1차 협력사가 실제 부담한 관세를 소급해 전액 지원하기로 한 것은, 조 단위 부담을 그룹이 일정 부분 흡수하는 결정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관세를 지원하는 방식이 ‘매입단가에 관세를 반영해 더 비싼 값에 사주는 구조’인 만큼, 1년치 숨통은 트이지만 관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상 협상과 FTA 재조정 없이 기업이 관세 폭탄을 대신 안고 있는 구조라면 지원 기간이 끝난 뒤의 충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더구나 국내 부품사는 2만1443곳 중 95%가 매출 300억원 미만 영세기업이고, 100대 부품사 기준 2차 협력사의 영업이익 감소율은 23.7%로 1차 협력사의 두 배를 넘는다. 현대차그룹이 5000여 개의 2·3차 협력사까지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프로그램의 설계와 실행 속도가 관세·환율·수주 감소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지는 아직은 물음표다.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11월 19일(현지시간) 아부다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UAE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11월 19일(현지시간) 아부다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UAE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연기관 부품사 전환도 당면과제

산업 구조 전환의 속도 차도 부담이다. 국내 부품기업 1만여곳 가운데 45.2%는 여전히 엔진·연료·배기계 등 내연기관 부품을 만든다. 친환경차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 비중은 15~18%에 그친다. 현대차그룹의 125조 투자는 SDV·전동화·수소·로봇에 집중돼 있다. 이 방향은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어떤 속도로, 어떤 비용 분담 구조로” 부품사 전환을 돕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마더 팩토리가 국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연기관 부품 중심의 2·3차 협력사가 자동으로 미래 밸류체인에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로봇 파운드리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차그룹이 말하는 로봇 파운드리는 ‘로봇 완성품 제조 + 중소기업 로봇 위탁생산’의 이중 구조를 갖는다. 중소 로봇기업 입장에서는 설계·프로토타입까지는 만들 수 있지만 양산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 만큼, 대기업의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을 맡길 수 있다면 분명 기회다.

그러나 계약 구조와 데이터·지식재산(IP) 배분 방식에 따라, 이 공장은 ‘중소기업의 등판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대기업 로봇 사업의 하청 공장’으로 고착될 수도 있다. 자동차 부품사가 로봇 부품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누가 핵심 모듈을 설계하고, 누가 단가 압박을 받는지에 따라 산업 공유지는 넓어질 수도 더 좁아질 수도 있다.

정부 산업정책과의 정합성도 짚어봐야 한다. 15조원 정책금융과 보조금 확대가, 실제로는 대기업의 대규모 설비투자와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만 흘러들어가는 구조가 되지 않으려면 조건 설계가 중요하다. 국내 생산 인센티브를 주더라도, 그 인센티브가 마더 팩토리와 일부 핵심 거점에만 집중되고 2·3차 협력사의 설비전환·인력 재교육·R&D 투자에는 충분히 도달하지 못한다면 산업정책은 현장의 괴리를 키울 뿐이다.

그럼에도 이번 현대차그룹의 125조 투자와 관세 지원 패키지를 단순히 ‘방어적 조치’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그룹 차원에서는 미국 관세 리스크와 국내 제조업 공동화 논란이 동시에 불거지는 국면을 피지컬 AI·로봇·수소·PBV 마더 팩토리로 산업 구조를 갈아타는 계기로 삼으려는 의지가 읽힌다.

125조 투자가 한국 제조업의 뿌리를 두텁게 만드는 마더 플랜이 될지, 몇몇 거점과 숫자만 남는 이벤트성 투자로 끝날지는 중소기업이 어디서,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투자 금액이 자동차 관련 중소기업계로 두루 흐르게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김기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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