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지은 밥맛 ‘건강한 한끼’ ... 발길 닿는 곳마다 ‘감성매장’
일본에서 유일하게 상수도 없는 마을
미네랄 풍부한 덕에 술맛·커피맛 일품
텐게츠안, 60여년간 명품 디저트 정평
소노맘마·히가시카와 펠리컨 입소문
너의 의자·배움의 의자 프로젝트 눈길

이른 아침부터 간단히 채비하고 나와 마을 한 바퀴를 둘러봤다. 하루가 일찍 끝나는 시골 마을에선 아침 역시 이르게 시작한다. 5분 정도 걸었을까? 미색(米色)의 주택들 사이로 붉은 벽돌로 마감을 한 건물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외벽 한가운데엔 ‘NO 5’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구글 지도를 켜 찾아본 이곳의 정체는 ‘스노우 리버 와인(Snow River Wines, 유키카와 양조)’이라는 이름의 와인 양조장이다.
히가시카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상수도가 없는 지역이다. 상수도가 없는 대신 대설산(다이세츠잔)의 눈이 녹아 만들어진 지하수를 생활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한다. 미네랄이 풍부한 덕에 물맛이 좋은 건 당연지사. 물맛이 좋으니 쌀맛도 좋고, 그 물을 활용해 만든 술이며 커피맛까지 좋을 수밖에.

스노우 리버 양조장은 이러한 히가시카와의 풍부한 수원을 토대로 마을 한 가운데 지어졌다. 1952년에 지어진 붉은 벽돌 창고를 개조해 양조 시설을 구축하고 포도밭을 일궈 2022년 7월, 첫 와인을 발매했다. 이후 지금까지 히가시카와 지역을 비롯한 훗카이도 전역에서 생산한 포도를 활용해 총 17종의 와인을 출하했다.
한 시간가량의 정처 없는 산책 끝엔 허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 커다란 케이크 모양의 간판이 붙은 가게에 불이 켜져 있었다. 9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연 이곳의 이름은 ‘텐게츠안’이라는 이름의 디저트 가게로, 무려 1957년 문을 연 히가시카와 마을의 대표 베이커리다. 대표메뉴는 히가시카와산 쌀가루로 만든 쉬폰케이크. 쉬폰케이크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구움과자와 형형색색의 미니 케이크가 쇼케이스 안팎으로 진열돼 있었다. 개중에 몇 개를 골라와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국내에도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많은 터라 맛은 평범하게 느껴졌으나, 반세기를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주민들에게 달콤한 아침 인사를 건넨 부지런하고도 다정한 손을 떠올리며 한 입 한 입 소담스럽게 베어물었다.
히가시카와 마을 곳곳에서는 텐게츠안 외에도 아기자기한 감성에 저마다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카페, 베이커리, 식당, 소품 가게, 숙박시설 등을 자주 마주칠 수 있다. 텐게츠안처럼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온 가게도 있지만 도회지에서 히가시카와로 이주해 온 이들에 의해 새롭게 생겨난 곳들도 여럿이다.
2022년 문을 연 ‘소노 맘마’도 그중 하나. 도쿄도 인근의 가나가와현에서 고등학교 교원으로, 제빵사로 일하던 부부가 히가시카와로 이주해 차린 가게다. 지역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로 반찬과 도시락, 빵 등의 식료품을 판다. 식재료 본연의 맛은 살리면서도 첨가물은 배제해 맛과 건강 모두 챙긴 소노의 음식들이 히가시카와 마을을 꼭 빼닮았다.

오래된 건물 2층에 세련된 인테리어로 반전 분위기를 선사하는 레스토랑 ‘온 더 테이블(On the Table)’은 고기의 풍미를 살린 함박 스테이크가 일품이다. 낮에는 커피와 식사를, 밤에는 맥주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공간이자 마을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한다.
‘히가시카와 펠리컨’은 문을 연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손님들이 알음알음 모여드는 곳이다. 마을 중심가와 꽤 거리가 먼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도 어떻게들 알고 철새처럼 날아드는 것이 신기하다.
이곳 역시 이주민에 의해 지어진 공간이다. 도쿄에서 10년간 프렌치 비스트로 ‘히로오 펠리컨’을 운영해 온 요리사에 의해 탄생했다. 식재료 공부를 위해 찾아온 히가시카와에 반해 아예 터를 옮긴 것이다.
베테랑 오너 셰프는 연륜을 바탕으로 홋카이도의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 코스 요리를 선보인다. 가성비와 완성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덕에 만족도가 좋다. 음식과 기가 막힌 페어링을 선사하는 짱짱한 와인리스트는 덤. 내벽을 뒤덮은 통창으로는 여름이면 푸릇한 들판이, 겨울이면 희디흰 설원의 풍경이 쏟아진다.
마당 한편엔 와인을 구매할 수 있는 와인숍 ‘코페리’가 자리하고, 식당 2층은 숙박 시설로 운영된다. 방 크기는 작지만 히가시카와의 드넓은 하늘과 풍광을 모두 조망할 수 있어 품이 꽤 넉넉하게 느껴진다. 경치를 보면서 독서나 술을 즐길 수 있는 자작나무 바 테이블과 노곤한 몸을 달래줄 욕조도 갖췄다. 히가시카와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낸 공간으로 ‘센트퓨어’(CentPure)를 빼놓을 수 없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센트퓨어는 한때 초등학교 건물을 활용해 마을이 운영하는 예술 중심 커뮤니티 센터로 거듭났다. 센터는 1관과 2관으로 나뉜다. 갤러리로 사용되는 1관에는 현대미술 작품과 함께 세계 최고의 의자 수집가로 통하는 오다 노리츠구의 의자 컬렉션을 상설 전시 중이다.
학교였을 당시 강당으로 사용했던 공간은 주민에게 개방, 다목적 홀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각종 기획전 등이 열리고 급식실 주방이었던 곳에서도 현지 농산물을 활용한 식품 가공 체험 및 이벤트 등을 주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도록 모두 개방하고 있다. 일본 유일의 공립 어학교인 히가시카와정립 일본어학교도 센트퓨어 내에 자리한다. 센트퓨어 2관은 도서관이다. 약 7만5000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도서뿐 아니라 히가시카와 사진 컬렉션부터 일본 최대의 국립공원인 다이세츠잔에 관한 고서와 문헌류, 사진 등을 아카이빙하고 공개 전시하고 있다.

도서관 입구에 들어서면 손바닥만 한 나무 의자들이 눈에 띈다. 의자의 정체는 ‘너의 의자’, 현지어론 ‘기미노이스’. 지역 대학원 세미나에서 제안됐던 아이디어를 정(町)에서 공식적으로 수용해 실시하는 히가시카와 마을만의 특별한 프로젝트다. 중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는 3년간 자신이 사용할 책상과 의자인 ‘배움의 의자’를 제공한다. 동시에 목재 책걸상을 관리하고 고치는 방법까지 가르친다.
히가시카와는 질 좋은 홋카이도산 목자재 가구를 생산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목공예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이 많고 외지의 가구 장인들도 이곳으로 모일 정도다. ‘너의 의자’와 ‘배움의 의자’ 프로젝트는 아이들을 환대하는 마음을 전달하면서도 마을의 목공예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그야말로 히가시카와다움의 표본이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shinda.write@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