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를 수 없는 스트리밍 대세
유일하게 “아니요”라 외친 놀란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제패
흥행까지 대박, 놀란의 힘 입증

‘극장에서 느끼는 경험’ 에 올인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 고집
‘세계관 공유’ 강력한 팬덤 형성
할리우드 ‘새 북극성’ 자리매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연합뉴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연합뉴스

크리스토퍼 놀란의 아카데미 감독상 시상자로 나선 사람은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20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나이트’ 이후 21세기 할리우드를 다시 세운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3월 10일 열린 96회 아카데미 영화상은 스티븐 스필버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으로의 대관식이나 다름 없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오펜하이머’ 편집을 마무리하고 맨 먼저 보여준 감독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철두철미한 비밀주의로 유명하다. 새로운 영화 프로젝트엔 암호명을 붙인다. 인터스텔라의 암호명은 피오나의 편지였다. 피오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딸 이름이다. 그런 크리스토퍼 놀란이 스티븐 스필버그한테 오펜하이머를 먼저 보여준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1981년 레이더스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대를 연 영화 감독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이후 할리우드는 대형 제작비와 대형 개방관과 대형 볼거리라는 3요소를 결합한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시대로 접어들었다.

스필버그식 할리우드 시대는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블록버스터 시대는 넷플릭스가 등장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스트리밍 시스템은 빠른 인터넷과 초대형 TV와 구독 서비스와 결합하면서 블록버스터 시스템을 대체했다.

 

워너 브라더스와 결별

블록버스터 시스템과 스트리밍 시스템의 명암을 가른 결정타는 코로나 팬데믹과 오징어 게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3년 넘게 이어지면서 개봉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관람 문화가 실종됐다. 오징어 게임의 흥행은 스트리밍 시스템이 블록버스터 시스템보다 더 빠르고 더 저렴하게 전지구적인 히트작을 양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결국 할리우드 스튜디오들도 앞다퉈 스트리밍 서비스에 뛰어들었다. 디즈니가 디즈니 플러스를 만들었고 파라마운트가 파라마운트 플러스를 만들었고 워너 브라더스가 HBO 맥스를 만들었다. 스트리밍 시대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보였다. 오직 크리스토퍼 놀란만이 유일하게 “아니요”를 외친 영화 감독이었다. 그 결과가 오펜하이머다. 오펜하이머의 흥행과 아카데미 석권은 할리우드를 포함해서 전세계 영화 제작 시스템이 중대한 변곡점인 이유다. 영화 산업의 흐름을 둘러싼 힘의 충돌인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워너 브라더스가 아니라 유니버설과 함께 만들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02년 ‘인썸니아’부터 2020년 ‘테넷’까지 20년 가까이 워너 브라더스하고만 일해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아내 엠마 토마스와 함께 2001년 창업한 영화 제작사 신카피의 사무실은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한켠에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제작하기 직전에 워너 브라더스와 정면 충돌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극장 개봉용 영화를 스트리밍 서비스인 HBO 맥스를 통해 풀어버렸다. 워너 브라더스가 극장 영화를 스트리밍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할리우드의 무게 중심이 극장에서 스트리밍으로 쏠리게 만든 결정타였다. 대다수 영화 감독들은 워너 브라더스의 위세에 눌려서 저항하지 못했다.

이때 워너 브라더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건 워너 브라더스가 키운 최고의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워너 브라더스의 제이슨 킬라 CEO를 상대로 직접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워너 브라더스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상업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다크나이트’ 3부작은 모두 워너 브라더스의 작품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워너 브라더스의 전쟁은 영화 산업의 운명을 건 노선 경쟁이었다.

이때 크리스토퍼 놀란은 극장용 영화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을 워너 브라더스가 아닌 다른 스튜디오와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오펜하이머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순제작비를 1억달러로 잡았다. 시나리오 초고상으론 러닝타임이 3시간이 넘었다. 솔직히 극악 확률의 도박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유니버설의 CEO 도나 랭클리한테 오펜하이머 제작을 제안했다. 유니버설은 오랫동안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지트였다. 스필버그와 유니버설은 E.T와 쥬라기 공원을 함께 만들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스필버그가 버티고 있는 유니버설이 극장 영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다.

유니버설도 워너 브라더스가 놓친 대어인 크리스토퍼 놀란을 잡고 싶었다. 순제작비만 1억 달러가 넘게 드는 오펜하이머는 유니버설로서도 부담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슈퍼 히어로물도 흥행작의 속편도 아니었다. 이런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니버설은 오펜하이머의 제작을 결정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힘이었다.

 

컴퓨터 그래픽 거부

크리스토퍼 놀란의 힘은 영화의 본질에 대한 집요한 고집에서 나온다. 30년 가까운 영화 경력 내내 지켜낸 영화적 고집이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고 막대한 관객 동원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06년 ‘프레스티지’를 디즈니와 제작한 적이 있었다. 정작 프레스티지 이후 다시는 디즈니와 작업하지 않았다. 이유는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시각 차이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프레스티지를 필름 카메라로 찍기를 원했다. 반면 디즈니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후반 작업을 하길 원했다. 프레스티지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동생 조나단 놀란이 5년을 준비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디즈니와 노선을 달리했다. 영화 철학의 차이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프레스티지 이후 본격적으로 탈디지털의 길을 걸었다. 2008년 다크나이트에선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까지 꺼내들었다. 아이맥스 카메라는 말도 안 되게 불편한 장비다. 최대 촬영 분량은 2분 30초 남짓이다. 필름 현상에만 4일이 족히 걸린다. 덕분에 촬영 예산만 일반 카메라의 4배 이상 들었다. 스테디캡 촬영도 거의 불가능하다. 소음이 너무 커 배우들의 대사를 현장 녹음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나이트에서 전체 러닝 타임 152분 중 28분을 아이맥스로 촬영했다.

컴퓨터 그래픽을 거부하고 아이맥스 카메라를 고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선택은 극장에서 느끼는 영화적 경험이라는 스펙터클에 영화 경력 전부를 걸기로 한 선택이었다. 같은 시기에 놀란과 결별한 디즈니는 마블 슈퍼 히어로 시리즈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넷플릭스는 가입자 2억명을 돌파했다. 컴퓨터 그래픽과 스트리밍의 시대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갔다. 2017년 ‘덩케르크’는 컴퓨터 그래픽 없이 대규모 전쟁 장면을 실사 촬영으로만 재현한 영화였다.

180페이지에 달하는 오펜하이머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맨 처음 찾아간 사람은 특수효과 감독이었다. 핵실험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 없이 재현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에서 세계 최초로 흑백 아이맥스 촬영을 시도했다. 런던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아이맥스 영화를 편집할 때 임대하는 아이맥스 전용관이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관객들이 극장에서 실제 사건과 같은 압도적인 영화적 경험을 얻어가길 원한다. 그것이 영화가 존재하는 산업적 이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아이패드로 보는 스트리밍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경험이다. 이런 고집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만 한다는 관객의 신뢰 혹은 신념으로 이어졌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극장료가 2배가 넘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챙겨봐야만 하는 하나의 이벤트이자 브랜드가 됐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스트리밍 시대 이전에 영화와 감독들이 가졌던 존재감을 21세기에도 지켜낸 유일무이한 감독이다. 영화 감독의 이름값만으로 관객을 극장으로 불어올 수 있는 거장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스트리밍과 컴퓨터 그래픽이 영화의 아우라를 지워버렸다. 오펜하이머는 전 세계적으로 9억5000만달러를 벌었다. 9억5000만달러는 온전히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 한 사람의 이름값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를 제패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아카데미 7관왕에 올랐다. 오펜하이머는 지난 3월 10일 열린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을 휩쓸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아내이자 오펜하이머의 제작자인 엠마 토마스가 작품상을 직접 수상했다. 엠마 토마스는 크리스토퍼 놀란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생애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4년 경력 동안 8번 아카데미에 이름을 올렸다.

 

캐스팅에도 독자노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흐름을 거스른 부분은 바로 캐스팅이다. “킬리언에게. 마침내 당신이 주연을 하는 걸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킬리언 머피를 캐스팅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직접 더블린으로 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붉은 종이에 검은 잉크로 타자를 쳐서 시나리오를 쓴다.

붉은 종이는 복사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킬리언 머피가 시나리오를 다 읽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비밀주의 때문이다. 이런 비밀주의와 세계관은 관객들이 놀란 영화를 극장에서 직접 봐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관에서 직접 보지 않으면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마이클 케인도 마찬가지다. 마이클 케인 역시 배트맨 비긴스 이후 줄곧 놀란 영화에 출연했다. 마이클 케인이 출연을 중단한 건 고령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케인은 올해 90세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으로 킬리언 머피를 캐스팅하는 것이 자신의 영화를 계속 관람해온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어들이는 요소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관객들은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동일 집단으로 구축돼 왔기 때문이다. 순제작비의 9배에 달하는 오펜하이머의 흥행 수익은 이런 세계관이 바탕이 돼서 가능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3가지 시간대로 구성했다.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1940년대와 오펜하이머의 청문회가 열렸던 1954년과 오펜하이머의 정적 루이스 스트르스의 인사청문회가 열렸던 1959년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3가지 시간대를 교차로 편집해서 관객들에게 오펜하이머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시간의 재구성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메멘토’ 이후부터 시종일관 다뤄온 주제다. ‘인셉션’은 여러 가지 시간대의 꿈이 등장한다. 인터스텔라 역시 서로 다른 시간대의 아빠와 딸의 이야기였다. 덩케르크는 오펜하이머처럼 3가지 시간대로 구성됐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자신의 이름값만으로 9억달러 어치의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모으는 건 시종일관 한 가지 주제만 평생토록 다뤄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거장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한 가지를 깊이 판 사람인 것이다. 거장은 자신의 주제 의식을 소재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하지만 결코 다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것도 계층 갈등이라는 주제를 그렇게 다뤄서였다.

96회 아카데미 석권이 할리우드의 산업 방향에 큰 변수인 건 그래서다. 영화 감독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기획물과 속편물이 넘치는 산업 트렌드 속에서 존재감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의 아카데미 7관왕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자신들의 새로운 북극성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스트리밍 시대를 거쳐 다시 스필버그가 이끌었던 할리우드의 전성기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이제 스트리밍의 시대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레이더스’는 크리스토퍼 놀란한테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편집자 주 : 레이더스는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첫 번째 모험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11세 때인 1981년 어머니와 함께 시카고에서 레이더스를 봤다. 워낙 인기가 많아서 맨 앞자리에 앉아서 봐야만 했다. 대형 스크린에서 쏟아질 듯 펼쳐지는 레이더스의 현실감과 박진감은 어린 크리스토퍼 놀란을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다. 아이맥스에 대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고집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인셉션한 것이다. 그렇게 놀란은 21세기의 스필버그가 됐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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