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주요 반도체 생산국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한 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반도체 산업 분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반도체가 최근 몇 년 동안 미국과 중국 간 전략 경쟁의 핵심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은 경제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군사적으로 전용 가능한 첨단 반도체 기술의 중국 유입을 전면 차단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장비의 대중(對中) 수출 과정에서 자국 기업에 적용되는 포괄적 규제를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에도 같은 수준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지난달 17일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미국의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 통제가 동맹국에 비해 복잡하고 포괄적이어서 자국 기업들이 경쟁에서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주장했다.

SIA는 미국 기업들이 품목별 수출 통제 대상으로 명시되지 않는 장비라도 첨단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면 중국에 수출할 수 없고, 이미 판매한 장비의 지원 서비스도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일본·대만·이스라엘·네덜란드 등 경쟁 기업들은 수출 통제 대상에 없는 장비를 중국에 수출할 수 있고 관련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고 전했다.

SIA는 “미국에서만 존재하는 이 같은 규제로 해외 경쟁자들이 버는 돈은 연구개발(R&D)에 투자돼 궁극적으로 미국 반도체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다”며 첨단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한국 등 동맹국들도 미국과 같은 수준의 규제를 적용하는 다자 방식의 대중 수출 통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전 세계 반도체 20%를 대한민국 반도체 기업이 만들어서 공급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를 함께 상대해 왔던 우리 반도체 업계로서는 적절한 대응 방식을 둘러싼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미국은 현금 지원과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를 주겠다며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기지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올 3월을 목표로 반도체 기업에 대한 수십억달러 규모의 보조금 지급 계획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주요 수혜 기업으로는 미국 인텔과 대만 TSMC, 한국의 삼성전자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이번 보조금 안은 바이든 대통령이 2022년 8월 서명한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것이다. 해당 법은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생산 보조금(390억달러)과 R&D 지원금(132억달러) 등 5년간 총 527억달러(약 75조5000억원)를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지원법 보조금 지급이 가시화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투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주에 최첨단 패키징 공장을 추진하는 가운데 삼성전자도 22조원이 넘는 투자로 미국 테일러시에 새 공장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윌리엄슨 카운티 산하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으며, 올해 말 양산에 나선다. 이 공장은 건설·설비 등 예상 투자 규모만 170억달러(약 22조5000억원)으로, 이는 삼성전자 역대 미국 투자 중 최대 규모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을 해외에 건설한 것은 텍사스주 오스틴시 공장에 이어 테일러시가 2번째다.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5G(차세대통신), HPC(고성능컴퓨팅), AI(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의 반도체를 생산한다. 특히 첨단 반도체 공정인 4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을 테일러 공장에도 도입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첨단 반도체 공장 부지로 인디애나주를 선정했다. 인디애나주에 들어설 SK하이닉스 패키징 공장은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들어갈 고대역폭 메모리(HBM) 제조를 위한 DRAM 적층에 특화한 시설이 될 것이라고 복수의 소식통이 전했다.

업계에서는 미국, 일본, 유럽처럼 우리나라 역시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 우리 정부는 인프라 구축, R&D 등 반도체 관련 예산으로 1조3000억원, 정책금융 연간 8조원 정도를 지원하지만 직접적인 보조금 계획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결국 이익이 되는 곳에 공장을 세우고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며 “미국, 일본 등 경쟁국들이 자국 반도체 산업 강화를 위해 공격적으로 나선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글로벌 업체들을 유치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 하제헌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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