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대응 없인 글로벌 시장서 도태
몸집 작아 발빠른 방향전환에 유리
정부차원 정책금융 대폭확대 시급

ESG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꽤 오래됐다. 2005년 유엔 글로벌 콤팩트(United Nations Global Compact)의 더 나은 투자시장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주제로 열린 ‘Who Cares Wins(배려하는 이가 이긴다)’ 콘퍼런스에서 처음으로 ESG 투자에 대한 개념이 제시된 것이다. 이때 모인 기관 투자자, 자산 관리자, 애널리스트, 글로벌 컨설턴트, 정부 기관 및 규제 기관들은 ESG 요인들이 장기 투자 시 매우 중요할 수 있음에 동의했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2006년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ncripi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UN PRI)이 출범했고 이는 전 세계적 ESG 투자 확산의 계기가 됐다.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수탁자로서 투자 의사를 결정할 때, 투자 대상 기업의 재무적 요소뿐만 아니라 ESG 등 비재무적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개념이 최근 들어 급부상한 이유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ESG의 기업 규제적 요소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경향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2014년부터 이미 ESG 의무공시제도를 발전시켜왔다. 미국의 경우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 이후, ESG 의무 공시를 비롯해 탄소중립 등 지속가능성 규제가 유럽의 수준을 쫓아가게 됐다. 이는 기업 입장에서는 ESG 관리를 잘하지 못했을 때 패널티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변화이다.

즉 최근 한국의 ESG 붐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ESG 투자 확산에서 기인했다기보단, 2020년 말부터 시작된 미국과 유럽 주도의 지속가능경영 글로벌 규제 도입 압력과 맞물리는 것으로 보인다. 대내적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 관리 방안과 ESG 관련 민간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ESG 의무공시와 탄소세 도입 등 대외로부터의 ESG 이슈가 급격히 부상하며 기업 혼란이 가중됐다. 이에 2022년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K-ESG 가이드라인’이 기업에게 공급된 것이다.

중기부, ESG통합플랫폼 운영

그렇다면 이러한 ESG 붐은 중소기업에게 그저 새로이 무겁게 부과되는 규제 사항, 비관세 장벽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안개 속에서도 더 큰 기회를 바라보고 위험을 감수하며 선제적으로 투자하는 기업가 정신은 분명 보답받는다.

화장품 원료 전문기업 K사의 경우, 글로벌 화장품 제조사인 L사에 납품하면서 ESG 평가에 부합하는 데이터 관리 및 정보공시 체계를 선제적으로 구축했다. 그 결과 납품업체로 선정됐을 뿐만 아니라 ESG 관리 이후 매출이 65% 증가했다고 한다.

선박엔진에 쓰이는 부품을 제조하는 S사의 경우, ESG 데이터 관리체계 구축,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의 자율적 발간 등의 활동이 글로벌 선박엔진 제조기업 W사의 협력사 평가 기준을 크게 상회해 450억원의 매출 증가를 가져오는 장기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제 중소기업도 ESG를 관리하지 않고는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기업들은 현재의 위치를 방어하기 어려워졌고, 한국 중소기업에게는 글로벌 공급망에 새로이 편입될 수 있는 기회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한국 중소기업이 ESG를 상대적으로 더 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한국은 중소벤처기업부라는 정부 부처가 존재하고, 이보다 더 촘촘할 수 없는 수준의 중소기업 지원을 수행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ESG 대응에 대해서도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중기부는 중소기업을 위한 ESG 통합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중소기업의 ESG 자가진단 서비스, 탄소중립 전환지원 서비스 등을 공급하고 있다. 자가진단을 통해 ESG 수준이 우수하다고 판명된 중소기업은 유리한 조건으로 시중 은행으로부터 융자도 받을 수 있다.

두 번째 요인은 한국의 제조 중소기업은 대부분 한국 대기업의 공급망 안에 있는 경우가 많아 대기업의 공급망 ESG 관리의 대상이 되며, 이와 더불어 한국은 대기업을 대상으로 상생의 수준을 평가하는 동반성장지수 등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으로 하여금 포용적인 공급망 ESG 관리를 하도록 유인하며 공급망에 속한 중소기업의 ESG 관리 수준을 높아지게 만든다.

어려울수록 기업가 정신 발휘 절실

다만 ESG 성과제고를 위해 선제적으로 투자할 여력이 있는 한국 중소기업은 극소수인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유럽 시장에는 ESG 성과 제고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금융 상품들이 개발돼 있는데, 한국 금융시장은 아직 중소기업의 ESG까지 포용할 역량은 부족하다.

따라서 정책금융이 이 시점 충실한 역할을 담당해줘야 할 것이다. 특정 ESG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기 위한 ESG 채권, ESG 성과 관리의 수준에 따라 금융의 조건이 달라지는 지속가능성 연계대출(SLL, Sustainability Linked Loan) 또는 채권과 같이 다양한 ESG 금융 모델을 적용해 정책금융을 공급해야 한다.

한편 중소기업이 기회를 포착하는 데 약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력과 재정 측면의 자원 여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지만, 중소기업은 작은 몸집으로 빠르게 피봇팅(방향 전환)이 가능하다는 강점을 지닌다. 실제로 포장재를 만드는 한 중소기업은 친환경 포장재로 신속하게 상품을 전환해 환경적 지속가능성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 큰 매출 성장을 올릴 수 있었다.

거시경제의 불확실성, 실물경제의 둔화, 모든 것이 차가운 겨울 같은 시대에 ESG 관리라는 새로운 숙제까지 얹어진 상황이 한국 중소기업에게 반갑지만은 않다. 이럴 때일수록 보이지 않는 기회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

눈앞에 안개가 자욱할수록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대가는 더욱 달콤할 것이다. 모두가 불확실성 앞에서 주춤했기 때문에 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한국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승전고가 도처에서 들려오길 간절히 소망한다.

 

나수미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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