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점·점 가까이… ‘김환기의 40년’을 오! 마주하다

길이 5m가 넘는 대형 벽화 작품 _여인들과 항아리와 관람객들
길이 5m가 넘는 대형 벽화 작품 _여인들과 항아리와 관람객들

신록 짙은 6월 어느 날, 커다란 나무의 푸른 잎이 터널처럼 드리운 길을 내달려 호암미술관에 도착했다. 1년 반 동안의 리노베이션을 마친 호암미술관에는 평일임에도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새롭게 단장한 미술관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환기의 회고전이 역대급 규모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회고전은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은 물론 도판으로만 볼 수 있었던 초기작과 미공개작을 비롯해 전세계 콜렉터들의 개인 소장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더욱 화제가 됐다. 여기에 동료 작가 및 가족들과 주고 받은 편지, 청년 시절의 사진, 낡은 스크랩북 등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와 유품 100여 건까지 선보여 그야말로 김환기 화백의 40년 추상 여정을 집대성한 역대 규모의 전시라는 평이다.

김환기 회고전은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은 물론 도판으로만 볼 수 있었던 초기작과 미공개작을 비롯해 전세계 콜렉터들의 개인 소장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코르뷔제의 건축이나 정원에다 우리 이조자기를 놓고 보면 얼마나 어울리겠소. 우리의 고전에 속하는 공예가 아직도 현대미술의 전위에 설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크나큰 사실입니다.”

한옥식 2층 건물인 호암미술관 본관을 무대로 하는 <한 점 하늘_김환기> 전은 크게 1부 ‘달/항아리’와 2부 ‘거대한 작은 점’으로 나뉜다. 웅장한 두 기둥 사이의 계단을 두고 2층에서는 1부 전시가, 1층에서는 2부 전시가 펼쳐진다.

김환기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페인트로 벽을 칠한 1부 전시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파리에 머물던 시절까지의 작업을 소개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교우들과 추상미술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던 시절의 그림, 스스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칭송한 백자 항아리가 그려진 그림,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피난하던 시절 푹푹 찌는 생철지붕 밑 다락 아래서 힘겹게 그린 그림 등이다. 이 시기에 작가는 한국의 자연과 전통을 동일시하며 작업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켜 갔다. 달과 항아리, 산, 구름, 새 등의 모티프가 그림의 주요 주제로 자리잡으며 그의 전형적인 추상 스타일로 정착돼 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달_항아리 전시 마지막 챕터의 영원의 노래
달_항아리 전시 마지막 챕터의 영원의 노래

그리고 그 과정은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기록물들, 가령 문예지에 기고했던 글이나 일기장에서 발췌한 글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전달된다. 그간 김환기의 작품은 일련의 편의에 의해 추상과 구상 또는 점화와 점화 이전 등의 작품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작가의 예술세계를 분절시키는 이분법적 분류 방식에서 벗어나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조형 세계로 바라보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덕분에 관람객은 도슨트의 설명이나 별도의 사전 지식 없이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수월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품 속에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사슴, 매화나무 열매, 달, 항아리, 한복입은 여성의 모습과 그것들이 조금씩 변화된 양상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연속적으로 확인하며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한국적 추상의 개념과 형식을 구축했는지 가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과 글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관람객들의 모습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1970 232×172㎝ 캔퍼스에 유채_개인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1970 232×172㎝ 캔퍼스에 유채_개인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이렇게 김환기 작품 활동의 몰랐던 내막을 하나씩 걷으며 가다보면 1부 전시장 중간 즈음에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백자대호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 김환기의 성북동 집 마당 한 편에 “달이 떠 있는 것처럼” 앉아 있던 항아리다. 작가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며 촉감이 동하고 흙에서 체온을 느껴진다며 둥글고 뽀얀 항아리를 자주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이는 유럽 양식이 지배적인 현대미술에 우리의 전통 공예가 위화감 없이 근사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작가의 확신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 전통미와 현대미술의 콜라보레이션이 성행하는 걸 보면 이를 일찍이 알아차린 김환기의 천재적인 선구안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2층 전시장 한 쪽에 자리한 아카이브 공간의 전시물도 흥미롭다. 스물 네살 청년 김환기의 사진, 작가가 애장한 도자기와 선반, 삽화와 기고문이 꼼꼼히 정리된 스크랩북 등에서는 ‘최고 경매가 낙찰’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김환기의 끊임없는 고뇌와 노력, 집념과 끈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어 시간을 초월한 자연과 예술의 영원성을 표현한 <영원의 노래>(1957), 전통미술양식과 점화의 씨앗이 공존하는 <여름 달밤>(1961) 등의 작품으로 1부 전시가 끝이 난다.

작고 한 달 전에 죽음을 예감하듯 그린 검은 점화 _17-VI-74 #337_로 전시는 끝이난다
작고 한 달 전에 죽음을 예감하듯 그린 검은 점화 _17-VI-74 #337_로 전시는 끝이난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주는 것일까”

한국적 소재로 서정적인 추상 작업을 가속화하던 김환기는 1963년, 50세의 나이로 국제 무대 진출을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던 뉴욕에서 김환기는 더이상 한국에서와 같은 중진 작가가 아니었다. 2부 ‘거대한 작은 점’은 그저 무수한 이방인 화가 중 한명으로 전락한 김환기가 국제 무대에서 통할 새로운 추상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뉴욕에 간 지 2년만인 1965년 경, 작가는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간 자주 사용했던 달, 산, 하늘 등의 자연적 요소를 선과 점, 색면으로 표현한다. 그때의 작품이 2부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별>(1964)이다. 작가는 연이어 <북동풍>, <남동풍>, <북서풍>(1965)을 통해 점화를 구체화한다.

그렇게 점화에 대한 계속되는 시도가 묻어나는 그림들을 지나쳐 둥글게 이어진 가벽을 통과하면 마침내 김환기의 점화를 처음으로 알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이 등장한다.

김환기의 본격적인 점화를 선보이는 섹션에서 전시 공간에 많은 고심을 담았다고 밝힌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점화’에서 ‘점’ 만큼이나 ‘점’이 이루고 있는 곡선도 중요한 지점이다”라며 “점화 속 곡선을 관람객들이 몸으로 느껴보고, 마치 김환기가 걸었던 산책의 길을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전달해보고자 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점화 섹션은 김환기 그림에서 점 만큼이나 중요한 곡선을 관람객들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점화 섹션은 김환기 그림에서 점 만큼이나 중요한 곡선을 관람객들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지나 마치 물 흐르듯 유려한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주’라는 별칭으로 사랑받고 있는 <5-IV-71 #200>(1971), 동양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하늘과 땅 24-IX-73 #320>(1973)가 등장한다. 특히 <하늘과 땅>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으로 점화이지만 하늘과 땅의 경계, 땅을 표현하는 듯한 능선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이어지는 공간에선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때 작품들은 검정 점화로 건강이 악화된 김환기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한다. 그리고 작고 한 달 전에 죽음을 예감하듯 그린 검은 점화 <17-VI-74 #337>로 전시는 끝이난다.

작가는 자신의 마음 속을 잘 말해주는 점화로 ‘새로운 창’을 열었다고 했다. 그의 점화는 그가 40년 간 이끌어온 추상의 집약이자 수렴이며,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보편적 세계에 대한 확장된 사유다. 말 그대로 거대한 작은 점이다.

이번 전시는 자연과 한국 전통적인 모티프를 추상세계로 이끌어와 끝내는 ‘점’이라는 형태로 승화시키고 이 점을 통해 인간과 자연, 예술을 하나의 세계로 엮어낸 김환기의 추상 여정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 shinda.writ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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