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공급망실사법안이 작년 12월 확정돼 올해 하반기 EU의회 최종표결을 앞두고 있다. 아직 법안 통과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이미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EU공급망실사지침 통과를 기정사실화 하고 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 또한 여러 위기 징후에도 대처를 소홀히 해 더 큰 위기에 빠지게되는 ‘회색 코뿔소(Gray Rhino)’ 현상을 겪지 않으려면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공급망실사법의 핵심은 원청기업에 공급망 전체의 환경경영과 노동환경 개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특히 공급망실사법은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한 중소 협력사의 실정을 고려해, 원청기업에 ‘중소 협력사 지원의무’를 명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EU공급망실사법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큰 틀에서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을 촉진하는 법이라고 규정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기업은 협력사를 평가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질적 지원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7일 발표한 ‘2024년 대기업 ESG 공급망 관리 실태분석’ 결과에 따르면 상장기업 75%가 공급망 ESG 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이 중 약 23%가 ESG 평가 결과에 따라 ‘고위험 협력사’와 거래를 중단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편, 공급망 ESG 확산을 위해 필수적인 협력사 지원은 교육(41.2%)과 평가컨설팅(31.1%)에 치우쳐 있고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ESG 개선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하드웨어(21.6%) 또는 인증지원(14.2%)은 저조한 실정이다. 추측컨대, 하드웨어적 지원이 교육·컨설팅보다 적은 이유는 대기업의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혹자는 영리 목적의 기업에게 협력 중소기업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근로자의 복지나 경영활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경영침해라는 비판도 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아예 거래를 끊고 공급망 관리에 적합한 새로운 거래처를 찾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공급망실사법의 입법 취지에 어긋난다. 대기업의 자본과 영향력을 토대로 협력사에 대한 적극적인 멘토링과 실질적 지원을 통해 사회적 플러스섬(plus-sum)을 달성하는 것이 ESG 공급망 관리의 목적인 만큼 대기업은 협력과 상생으로 공급망과 사회의 환경, 노동 수준을 개선할 책임이 있다.

물론, 단기적으로 협력사 관련 ESG 투자시 대기업의 비용이 증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협력 중소기업이 구직자, 소비자, 고객 등에 매력적인 기업으로 인식되면 우수한 인재유입을 통해 장기적인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중소 협력사가 참여하고 있는 공급망 전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특히, 이미 선진국 수준의 환경·노동법규를 준수하고 있는 한국 중소기업의 경우 강제노동과 ‘피의 다이아몬드’ 같은 분쟁광물 사용 등이 만연한 중국, 아프리카 등지의 기업과 비교할 때 적은 투자로 글로벌 수준의 ESG경영을 달성할 수 있다.

ESG경영을 위한 협력사 지원은 약자에 대한 시혜성 지원이 아니다. 대기업이 가치사슬 내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이를 통해 ESG 경영 패러다임의 확산에 대응하는 한편 치열한 공급망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대기업의 자구노력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따라서 대기업은 ESG경영 실천의 책임을 중소기업에 전가할 것이 아니라 탄소 감축 설비 지원과 같은 하드웨어적 지원을 확대하는 등 적극적인 상생협력을 통해 공급망 전체의 ESG 경영을 이끌어야 한다. 정부 또한 이러한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 강화를 위해 제도적 환경조성과 세제 등 인센티브 지원에 서둘러 실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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