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이 인정한 ‘월스트리트 성인’
세계 최초로 시장지수 추종 펀드 출시
낮은 운용수수료로 더 높은 수익 제공

뱅가드 펀드라 명명, S&P500 추종
‘스테이 더 코스’…장기투자 적극 권유
펀드매니저 아닌 주주 이익실현 방점

창설 30년 지나자 대기만성펀드 입증
글로벌 2위 자산운용사로 자리매김
‘주식투자는 국민스포츠’ 변화의 주역

존 보글은 인덱스 펀드의 창시자이자 뱅가드 그룹의 창업자다
존 보글은 인덱스 펀드의 창시자이자 뱅가드 그룹의 창업자다

“개인 투자자들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을 기리는 조각상을 세워야 한다면 그건 존 보글이어야 한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존 보글은 지난해 11월 28일 별세한 찰리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과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투자자다. 5년 전인 2019년 1월 16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존 보글은 여전히 투자 시장의 지배자다. 워런 버핏은 매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에서 뱅가드의 대표적 패시브 펀드인 뱅가드 500 인덱스 펀드에 가입하라고 조언해왔다.

존 보글은 인덱스 펀드의 창시자다. 뱅가드 그룹의 창업자다. 워런 버핏이 오마하의 현인이라면 존 보글은 월가의 성인이라고 불렸다. 존 보글이 월가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개인 투자자들 모두를 위한 금융 발명품인 인덱스 펀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덱스 펀드는 수수료가 낮고 수익률은 높은 이상적인 금융 상품이다. 솔직히 월가나 여의도에 서식하는 같은 금융 전문가들보단 월가나 여의도 바깥의 평범한 개인 투자자들한테 훨씬 유리한 구조다.

덕분에 존 보글이 창업한 뱅가드 그룹은 2023년 기준 글로벌 2위 자산운용사가 됐다. 총 운용자산 규모는 7조2000억달러에 달한다. 1위 블랙록과 3위 스테이트 스트리트와 사실상 자산운용 시장을 3분할하고 있다.

사실 존 보글이 처음 뱅가드 펀드를 만들었을 땐 모두가 그를 무시했다. 보글의 바보짓이라고까지 불렀다. 1975년 12월 31일 세계 최초로 인덱스 펀드가 등장했을 때 월스트리트의 분위기는 그랬다.

인덱스 펀드는 시장 지수를 추종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장 수익률만큼 수익을 내는 펀드다. 그래서 펀드 매니저가 능동적인 종목 선택으로 시장 수익률을 초과하는 이익 실현을 기대하는 액티브 펀드와 대조해서 패시브 펀드라고 불린다. 1975년 당시에는 채권조차도 너무 점잖은 투자법이라고 분류되던 시절이었다. 대박을 꿈꾸는 투자자들은 주식에 몰렸고 오로지 신사만 채권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패시브 펀드는 환영 받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인덱스 펀드를 최초로 구상한 존 보글은 호언장담했다. 지난 30년 동안 액티브 펀드의 평균 수익률은 9.7%였다. S&P500을 추종할 경우 패시브 펀드가 존재했다면 수익률은 11.3%였을 것이다. 앞으로 30년 뒤에도 패시브 펀드와 액티브 펀드는 똑같은 성적표를 받아들게 될 것이다. 시간이 이긴다는 얘기였다.

 

시장에 휩쓸리지 않는 투자 조언

30년 뒤 보글의 바보짓은 보글의 업적으로 바뀌었다. 1975년 세계 최초의 인덱스 펀드 출시에 자문을 맡았던 변호사는 당시 1000주를 주당 15달러에 매수헀다. 총매수금은 1만5000달러였다. 2018년 자신이 4493주를 보유하고 있고 총 평가액은 113만 달러라고 밝혔다.

퍼스트 인덱스 인베스트먼트 트러스트라는 길고 설명적인 이름이었던 존 보글의 인덱스 펀드는 이젠 이름을 짧고 간결하게 바꿨다. 뱅가드 500 인덱스 펀드다. 뱅가드의 인덱스 펀드 시장 점유율은 43%에 달한다.

존 보글이 인덱스 펀드를 만들게 된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존 보글은 뱅가드를 창업하기 전엔 웰링턴 자산운용의 젊은 CEO였다. 사내정치에 휘말리면서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믿었던 동업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손실을 존 보글의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이때 존 보글은 울화가 치밀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때 존 보글이 반격의 수단으로 구상한 것이 인덱스 펀드였다. 존 보글은 다양한 투자 관련 명언을 남겼다. “도넛보단 베이글을 먹어라”도 유명하다. 단기투자보단 장기투자를 하라는 조언이었다. “스테이 더 코스”라는 말도 남겼다. 시장이 격랑에 휩싸여도 항로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유명한 말은 “전략은 구조를 따른다”는 것이다. 인덱스 펀드라는 전략이 존 보글이 처한 구조에서 비롯됐기 때문이었다. 고객을 위해 수수료를 낮추는 인덱스 펀드 전략은 그런 구조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존 보글은 웰링턴 자산운용에 입사했다. 웰링턴 자산운용은 주식투자와 채권투자를 혼용하는 혼합형 펀드가 대표 상품이었다. 당시 주식과 채권에 모두 투자한다는 것은 보수적인 투자법으로 인식됐다. 고고 시대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미국은 자유세계의 리더였다. 2차 대전 전후 호황을 만끽하던 미국 증시는 뭘 사도 올랐다. 무조건 고인 시대였다.

35세에 웰링턴 자산운용의 CEO가 된 존 보글은 고고 시대에 걸맞게 주식 투자 비중을 늘렸다. 그러기 위해서 공격적인 주식 투자를 주무기로 하는 4인 공동창업자로 이뤄진 신생 자산운용사와 합병을 추진했다. 이게 패착이었다. 고고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50개 종목이 거품을 주도했던 니프티피프티가 폭락 사태로 이어지면서 웰링턴 자산운용도 큰 손실을 봤다.

그런데 이걸 주도했던 4인 공동창업자들은 그 책임을 존 보글한테 덮어씌웠다. 존 보글이 웰링턴 자산운용의 CEO라는 이유에서였다. 쫓겨난 존 보글은 반격을 준비했다. 바뀐 구조에 걸맞는 새로운 전략 무기를 찾았다. 그것이 인덱스 펀드였다.

펀드의 주인은 원래 펀드의 주주다. 펀드 투자자는 공모를 한다. 그래서 투자자가 곧 주주인 법인 구조가 된다. 뮤추얼 펀드라고 불리는 이유다. 소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사모를 하는 헤지펀드와 다르다. 자산운용사는 이런 뮤추얼 펀드의 자산 운용권을 갖고 있을 뿐 주인이 아니라 대리인일 뿐이다.

그런데도 대리인이 펀드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건 펀드 주주들은 투자 전문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뮤추얼 펀드 주주들이 높은 운용 수수료를 대리인인 자산운용사한테 납부하는 구조가 당연시됐다.

존 보글은 대리인 문제와 수수료 문제라는 2가지 약점을 노렸다. 존 보글은 웰링턴 자산운용 CEO에선 쫓겨났지만 여전히 웰링펀 펀드의 주주이자 이사였다. 존 보글은 웰링턴 자산운용과 웰링턴 펀드를 분리했다. 웰링턴 펀드가 스스로 자산을 운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명분은 펀드를 대리인한테서 진정한 주주한테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주주들에게 낮은 운용수수료로 더 높은 수익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존 보글은 자체적인 운용력을 가진 새로운 펀드의 이름을 뱅가드라고 지었다. 뱅가드는 영국의 이순신 장군인 넬슨 제독이 나일강 전투에서 탔던 기함의 이름이었다. 뱅가드는 선봉장이라는 뜻이다. 명분이야 그럴 듯했지만 사실상 이 싸움은 쫓겨난 CEO와 쿠데타 세력의 내전에 불과했다. 언론은 “둘 다 역병에 걸렸냐”며 조롱했다. 존 보글은 명분을 정당화할 전략이 필요했다. 1년 동안의 절치부심 끝에 1975년 12월 31일 퍼스트 인덱스 인베스트먼트 트러스트라는 인덱스 펀드를 출시했다.

인덱스 펀드는 회전비용도 판매수수료도 거의 없다. 시장 지수를 추종하기 때문에 한번 포지셔닝을 잡으면 자꾸만 사고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존 보글은 거래비용이 투자금의 0.2%에 불과하도록 설계했다.

 

시가총액 비중에 따른 투자 제시

뱅가드 펀드가 최초의 인덱스 펀드였던 건 아니었다. 처음 인덱스 펀드를 만든 건 1960년대 웰스파고였다. 문제는 웰스파고의 운용전략이었다. 웰스파고 펀드는 다우존스를 추종했다. 그런데 다우존스에 상장된 모든 기업을 똑같은 비중으로 매수했다. 성장 기업도 부실 기업도 똑같이 바구니에 담은 것이다.

존 보글은 뱅가드에 다른 전략을 적용했다. S&P500을 추종하면서도 시가 총액 비중으로 담도록 설계했다. 거래수수료는 다소 올라갈 수 있었지만 대신 시장 수익률을 더 정확하게 추종할 수 있게 됐다. 존 보글은 인덱스 펀드 출시를 가로막는 온갖 규제 장벽도 극복했다. 수만 개 이상의 펀드 계좌별로 서로 다르게 운용 수수료를 계산하는 복잡한 산식도 만들어냈다.

운용이 필요없고 투자자가 주주인 뱅가드 펀드는 폴 새뮤얼슨의 극찬을 받았다. 폴 새뮤얼슨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였다. 폴 새뮤얼슨은 월스트리트의 대리인 문제를 지적해왔다. 주인이 아닌 펀드 매니저가 주인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구조를 질타했다. 폴 새뮤얼슨에게 프린스턴 대학교 제자인 존 보글은 그런 문제를 앞장서 해결한 선봉장이었다. 사실은 사내 정치라는 내전 구조가 만든 전략적 결과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전략은 구조를 따르기 때문이다.

 

항로 사수하는 보글함대

뱅가드 인덱스 펀드는 처음엔 액티브 펀드보다 인기가 없었다. 일단 자금도 부족해서 S&P500의 500개 종목을 모두 살 수가 없었다. 미완의 인덱스 펀드였던 것이다. 시장 수익률을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는 단기 성과를 낼 수 있는 액티브 펀드와 달리 장기 투자가 기본이다. 당장은 액티브 펀드의 화려함에 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뱅가드의 초창기 라이벌은 피델리티였다. 피델리티 자산운용에는 전설적인 투자자인 피터 린치가 있었다. 피터 린치는 던킨도넛츠와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고 던킨도너츠 주식에 투자해서 10배 이익을 낼 정도로 특출난 펀드 매니저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13년 동안 연평균 30%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무려 80%의 수익률을 기록한 해도 있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피터 린치는 1990년을 끝으로 펀드 매니저에서 은퇴했다. 마젤란 펀드는 선장을 잃고 대서양을 헤매기 시작했다. 반면 존 보글이 이끄는 뱅가드 펀드는 창설되고 30년이 지나면서 마침내 대기만성 펀드라는 걸 입증하기 시작헀다. 1988년 자산규모가 10억달러 이상으로 업계 41위가 됐다. 수익률은 연평균 10% 안팎으로 꾸준했다.

이때부터 워런 버핏은 본격적으로 뱅가드 인덱스 펀드를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에게 권유하기 시작했다. 시장 전체에 투자하면서도 수수료는 0.02%인 장기투자 펀드야말로 시장을 진정으로 이기는 법이라는 얘기였다. 당시 버핏의 말을 따랐던 장기투자자는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2023년 기준 인덱스 펀드의 총자산 규모는 2조4000억달러다. 전체 주식형 펀드의 25% 이상이다. 인덱스 펀드 시장의 40% 이상을 뱅가드 펀드가 점유하고 있다. 규모가 커지면서 연평균 수익률은 다소 줄었지만 꾸준한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수수료는 매년 낮아져서 업계 최저선을 유지하고 있다. 개인 투자자들이 장기적으로 시장을 이기는 가장 저렴한 방법인 것이다.

존 보글은 인덱스 펀드를 통해 투자를 엘리트 스포츠에서 국민 스포츠로 변화시켰다. 누구나 시장에 투자해서 장기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줬다. 워런 버핏이 존 보글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존 보글은 자신을 웰링턴 자산운용에서 쫓아냈던 4인방과도 화해했다. 존 보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32세에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 받았지만 심장 이식을 받고도 평생을 일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뱅가드 그룹의 사옥에는 모두 넬슨 함대의 이름을 붙였다. 골리앗, 알렉산더, 테세우스, 빅토리 등이었다. 2019년 1월 별세하기 6개월 전에 12번째이자 마지막 저서를 남겼다. 제목은 스테이 더 코스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항로를 사수라고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보글 함대의 인덱스 함대는 지금도 항로를 사수하고 있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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