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선비의 풍류 음미하며 사색에 빠지다

가을의 끝자락, 고택이 품은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자. 근현대사의 흔적을 따라 사색을 즐겨도 좋고, 조선의 대학자 집에서 하룻밤 머물러도 좋다. 옛 자취가 새겨진 너그럽고 포근한 풍경이 마음을 따스하게 녹인다.

개항기 인천의 역사를 한눈에, 인천시민애집

인천시민애집
인천시민애집

1883년 개항 직후, 인천항 주변에는 외국인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일본과 청나라 사람은 물론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서양인도 인천항 인근에 조계지를 형성했는데, 이들은 각 나라  별로 조계조약을 체결해 경계를 나누고 개발에 나섰다. 지금도 인천항 주변의 인천개항장문화지구와 차이나타운은 당시 일본과 청나라 조계지였던 모습이 남아 있다.

인천시민애(愛)집 역시 조계지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자유공원 남쪽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쓰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업가가 저택을 지어 살던 곳을 인천시가 매입, 한옥 형태의 건축물을 올리고 시장 관사로 활용했다. 이후 인천시청이 이전해 인천역사자료관으로 쓰이다가, 2021년 7월 재정비를 마치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인천시민애집은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뉜다. ‘1883 모던하우스’는 과거 시장 관사를 개조한 근대식 한옥이다. 일본식 저택이 있었을 때 모습을 간직한 ‘제물포정원’이 그 주변을 감싼다. 경비동은 인천항과 개항로 주변을 조망하는 ‘역사 전망대’로 이용하고 내부는 전시관 역할을 한다.

인천시민애집 주변으로는 개항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개항기 서양인이 사교 모임을 하던 구 제물포구락부 건물이 대표적이다. 대불호텔전시관에는 한국 최초 서양식 호텔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근대문학 작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국근대문학관도 위치한다.

자세히 보아야 더 어여쁜 논산 명재고택

논산 명재고택
논산 명재고택

논산 명재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대 교육에 전념한 조선 대학자 명재 윤증의 집이다. 30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을 간직한 고택은 뒤쪽으로 선 고운 산과 마당에 단아한 인공 연못, 열을 맞춰 선 장독대가 운치를 더하는 아름다운 집이다.

고택은 안채와 광채(곳간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조선 양반 주택의 가치에 실용성과 과학적 원리가 돋보이는 한옥으로 꼽힌다. 고택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는 사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2칸 규모로 안채와 달리 담 없이 개방된 형태다. 창호가 많아 ‘경치를 빌린다’는 차경(借景)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연결하는 안고지기도 독특하다. 안고지기는 미닫이와 여닫이 기능을 합친 문으로 네 짝짜리 문이 가운데 두 짝은 미닫이, 양쪽 끝은 여닫이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가운데 문을 밀고 여닫이로 활용할 수도 있는데 여닫이로 모든 문을 개방하면 공간 확장이 가능해 많은 사람이 모일 때 유용하다.

일조량과 바람의 이동을 고려한 안채와 광채 배치 등에서도 선조의 지혜가 돋보인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뒤에 내외벽을 설치하고 벽 아래 틈을 둬 안채 대청에서 방문객의 신발을 보고 안주인이 대비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인공 연못, 장독대, 고목은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배롱나무가 우직하게 자리를 지킨다.

명재고택은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지정된 장소 외 출입을 금하며 고택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4시(하절기 오후 5시)까지며 관람료는 없다.

현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함양 일두고택

함양 일두고택
함양 일두고택

경남에는 한옥 마을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개평한옥마을은 높은 기품을 간직한 동네로 유명하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한옥 60여채가 모여 있고, 마을 중심에 이 지역의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는 함양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이 자리한다.

일두고택은 일두 정여창의 집이다.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은 동방오현(우리나라의 뛰어난 현인 5명)에 오른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지금의 일두고택은 정여창이 세상을 뜨고 약 1세기가 지나 건축했다. 이후 여러 차례 고치고 새로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입구부터 당상관(정삼품 이상) 벼슬을 지낸 인물이 사는 집에만 둘 수 있다는 솟을대문이 눈에 띈다. 집 안팎으로 걸린 편액에는 인두고택의 자부심이 흐른다.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온 집에 내린 정려를 무려 5개나 받았다.

사랑채에는 정여창의 후손이 사는 집이란 사실을 말해주는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걸렸고, 그 뒤 방문 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충성과 효도와 절개와 의리)라고 커다랗게 쓴 종이가 붙었다. 누마루에서는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 풍경이 보인다. 사람이 조성했다고 하나, 장대하게 자란 소나무와 그 아래 삼봉(三峯)을 상징하며 세운 돌까지 영락없는 자연의 모습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을 지나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연결되고, 곡간과 정여창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차례로 나온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이웃과 자연을 생각하는 넉넉한 품, 구례 운조루

구례 운조루
구례 운조루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의 운조루(雲鳥樓, 국가민속문화재)는 너그럽고 포근한 고택이다. 1776년 류이주가 낙안군수를 지낼 때 지은 집으로 250년 가까이 잘 보존된 외관에, 고택에 스민 정신이 면면히 전해온다.

류이주 선생은 낙안에서 가까운 곳에 집터를 살펴보다가 뒤에는 지리산이, 앞에는 섬진강이 흐르는 명당에 운조루를 건축했다. 운조루는 규모가 제법 크지만,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한 자태가 돋뵌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긴 뒤주가 눈에 띄는데 이는 류씨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보물이다. 쌀 2가마니 반 정도 들어가는 뒤주에 항상 쌀을 채워 곤궁한 이웃이 가져가게 했다. 고택에 들어서면 꾸미지 않은 풍경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부드러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랑채 누마루는 운조루의 백미다. 여름에는 해를 가리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는 들어열개가 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가롭게 운치를 즐기기 좋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곳에는 부엌이 있다. 낮은 굴뚝이 돋보이는 부엌엔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이 담겨 있다. 운조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려 있으며 관람료는 없다.

운조루에서 자동차로 5분이면 닿을 거리에 위치한 섬진강어류생태관에서는 다양한 민물고기와 멸종 위기종인 수달 한 쌍을 만날 수 있다. 매월 끝자리 3, 8일에 여는 구례 5일시장에선 갖가지 주전부리를 파는 청년점포가 생기를 더한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 shinda.write@gmail.com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