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스타 카니예 “나치 사랑한다”물의
디자인 협업한 운동화 ‘이지’재고처리
전체매출 10%·年 20억달러 손실초래

나이키 공세에 스트리트 부문도 흔들
대리점 고수하다 유통구조 혁신 놓쳐
‘푸마’회생시킨 굴덴, 구원투수로 등판

카니예 웨스트
카니예 웨스트

’(Ye) 때문이다. 아디다스가 예 때문에 31년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아이다스는 지난 20224분기에 72400만 유로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한화로 1조원에 달한다. 2023년 전망도 어둡다. 2023년에도 역시 1조원 가까운 영업손실을 추가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번 511일 열릴 주주총회에선 주주배당금까지 삭감할 계획이다. 2021년 기준으론 주당 3.3유로였던 배당금을 2022년 기준으론 주당 0.7유로로 줄인다. 배당금이 5분의 1토막이 나는 것이다. 카니예 웨스트 때문이다. 이젠 예로 예명을 바꾼 미국의 글로벌 힙합 스타다.

아디다스와 카니예 웨스트는 202210월 콜라보 계약을 전격 중단했다. 사실 단순 콜라보가 아니었다. 카니예 웨스트가 디자인한 운동화인 이지(Yeezy)는 아디다스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연간 20억 달러 규모였다. 콜라보 중단의 여파는 컸다. 당장 쌓인 이지 운동화는 재고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의류 업체들은 재고를 다단계로 처리한다. 처음엔 할인판매를 한다. 그 다음엔 아울렛으로 보낸다. 각종 재활용 방안을 모색한다. 그렇게 하다 하다 안 되면 그때서야 재고로서 재무제표에 대손상각으로 반영한다. 상각은 최후의 방법이란 뜻이다. 그런데 아디다스는 잘 나가던 이지를 한꺼번에 손실 처리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니예 웨스트의 기행이 도를 넘어선 탓이다. 카니예 웨스트는 2022108유대인들에게 데스콘3를 실행할 것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데프콘은 미국의 방어준비태세를 말한다. 유대인들을 대량 살상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2212월엔 인포워스라는 극우 음모론 방송에 출연해서 나는 나치를 사랑한다고 외쳤다. 카니예 웨스트는 당시 검은 복면을 썼다. 그렇지만 진행자가 미스터 웨스트라고 부르자 라고 대답했다.

트위터에는 트위터를 빼앗아야 하는 3대 악동이 있다. 정치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경제에선 일런 머스크 테슬라 CEO. 엔터에선 카니예 웨스트다. 문제는 트럼프와 머스크는 돌발적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트윗을 하는 반면 카니예 웨스트는 자기 파괴적인 트윗을 한다는 데 있다.

 

아디다스 형제·부자의 난

카니예 웨스트는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선 조울증으로 잘 알려진 정신질환이다. 공격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극단적 상황으로 내몬다. 문제는 카니예 웨스트가 벼랑 끝으로 몬 것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디다스까지 끌어내렸다.

사실 2013년 아디다스가 카니예 웨스트와 콜라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지는 아디다스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이지는 카니예 웨스트의 별명이다. 아디다스는 스포츠와 스트리트에서 모두 숙명의 라이벌 나이키한테 밀리고 있었다. 아디다스는 힙합 뮤지션과 콜라보를 한 이지를 통해 스트리트에서 전통적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스포츠와 스트리트는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각축전을 벌여온 2개의 시장 전선이다. 원래 스포츠의 최강자는 아디다스였다. 일단 출발이 나이키보다 40년은 빨랐다.

아디다스는 1924년 동생 아돌프 다슬러와 형 루돌프 다슬러에 의해 창업됐다. 둘다 독일의 기업인이다.

형 루돌프의 애칭은 루디였다. 동생 아돌프의 애칭은 아디였다. 원래 이름은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이었다. 동생 아디는 신발에 미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 형제의 아버지는 신발 공장 봉제 기술자였다. 반면 형 루디는 사람 좋아하는 전형적인 사업가였다.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이 스포츠 무대에서 품질을 인정받게 된 계기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었다. 이때 세계적인 육상 스타 제시 오웬스를 설득해서 자신들의 운동화를 신게 만든 장본인이 형 루디였다. 제시 오웬스가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르면서 동생 아디가 만든 운동화도 인정 받았다. 루디의 영업력과 아디의 기술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문제는 성공 이후였다. 형 루디는 2차 세계 대전에 징집된 사이 회사의 경영권은 동생 아디의 아내 캐네 다슬러한테 넘어갔다. 사실 루디와 아디 모두 나치 부역자였던 건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내몰린 루디는 전쟁이 끝나자 아디를 나치 부역자로 밀고해버린다. 아디다스가 카니예 웨스트의 유대인 인종 학살 발언에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결국 루디는 새로운 회사를 차린다. 그게 푸마다. 아디 역시 회사 이름에서 형제를 뺀다. 그게 아디다스다.

아디다스의 내분은 형제의 난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자의 난도 있었다. 루디를 밀어낸 아디와 아내 케네 사이엔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가 있었다. 호르스트 다슬러는 아버지처럼 신발 밖에 모르는 장인이 아니었다. 아디다스를 토탈 스포츠 브랜드로 만들고 싶어했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호르스트 다슬러는 프랑스 지사를 세웠다. 큰아버지 루디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독립해버린 것이었다. 이때 만든 독자적인 수영복 브랜드가 아레나다. 호르스트 다슬러는 대서양 넘어 미국 시장의 급성장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스포츠시장 접수한 나이키 러닝화

카니예 웨스트가 디자인한 운동화인 이지(Yeezy)는 아디다스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카니예 웨스트가 디자인한 운동화인 이지(Yeezy)는 아디다스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아디다스의 서진 정책을 추진했다. 정작 호르스트의 미국 진출은 실패했다. 아버지의 본사가 도와주지 않은 탓도 있었다. 독일 브랜드에 대한 미국 소비자들의 반감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호르스트가 미국 현지화를 하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탓이 컸다.

이렇게 세계 1위 아디다스가 형제의 난과 부자의 난으로 헤매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브랜드가 나이키였다. 나이키는 아디다스의 텃밭인 스포츠 시장을 잠식해나갔다. 러닝화로 미국 생활 체육 시장을 장악했다.

틈만 나면 뛰는 미국인들의 소비패턴에 딱 맞았다. 1990년대부턴 마이클 조던을 앞세운 스타 마케팅으로 농구를 비롯한 주요 스포츠 시장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최초의 농구화는 아디다스가 만든 슈퍼스타였다. 마이클 조단조차도 청소년 시절엔 아디다스 농구화를 신었을 정도였다. 마이클 조던의 에어 조던이 등장하면서 아디다스는 결국 축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스포츠 시장에서 밀리는 형국이 됐다.

이때 아디다스를 구한 게 스트리트였다. 유명 힙합 뮤지션들이 아디다스를 신고 아디다스를 입으면서 아디다스 특유의 3선 디자인은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이 됐다. 나이키가 조던으로 돈을 벌 때 아디다스는 힙합으로 돈을 벌었다. 2010년대 아디다스가 카니예 웨스트와 공격적인 콜라보를 이어갔던 건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디다스를 제2 창업했다고 평가받는 전문경영인 베르나드 타피에가 아디다스의 스트리트 패션화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베르나드 타피에는 말 많고 탈 많았던 가족 경영 체제에서 전문 경영 체제로 전환한 아디다스가 내세운 첫 번째 전문경영인이다. 타피에는 원래 불꽃 모양이었던 아디다스 로고를 3선 로고로 전환한 장본인이다. 아이다스의 대표적인 패션 브랜드인 아디다스 오리지널을 만들었다. 비틀즈 멤버 폴 메카트니의 딸인 스텔라 매카트니를 디자이너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패션브랜드로서 아디다스는 나이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스포츠에선 나이키한테 완전히 밀렸어도 아디다스한텐 스트리트가 있었다.

나이키의 반격이 문제였다. 아디다스 오리지널에 나이키는 콜라보레이션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슈프림과 스투시처럼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들과 나이키가 협업을 하기 시작하자 아디다스 오리지널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스트리트 패션의 특징은 차별성이다. 우리 클랜과 너희 클랜을 구분하기 위해 패션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디다스 삼선은 이젠 더 이상 우리 클랜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아디다스는 나이키한테 스트리트를 잠식당했지만 나이키의 스포츠를 추격하진 못했다.

오히려 골프 시장은 타이거 우즈를 앞세운 나이키한테 내줬고 심지어 자존심인 축구에서도 밀리기 시작했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월드컵 대표팀이 나이키한테 넘어간 게 컸다.

그래서 아디다스한테 글로벌 힙합 스타 카니예 웨스트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존재였다. 사실 카니예 웨스트와 먼저 콜라보를 했던 건 나이키였다. 나이키는 2009년 카니예 웨스트와 협업해서 에어 이지를 만들었다. 첫 발매부터 완판이었다. 리셀 가격도 천정부지였다.

 

에어조던 대우 요구한 에어 이지

나이키가 스트리트에서 아디다스에 일격을 가한 순간이었다. 카니예 웨스트는 에어 이지도 에어 조던과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했다. 마이클 조던은 신발 한 켤레가 팔릴 때마다 로열티를 받는다. 나이키는 카니예 웨스트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신 1000만달러를 제시한다.

이때 아디다스가 역제안한 액수가 1억달러였다. 나이키의 10배였지만 결코 비싼 값은 아니었다. 이지 덕분에 아디다스는 나이키한테 빼앗길뻔한 스트리트를 수성할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리셀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아디다스 운동화는 이지였다. 지난해 2022년 카니예 웨스트가 자멸하고 아디다스가 손절할 때까지는 말이다.

아디다스는 다시는 한 명의 사람이나 협업 라인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2023년 아디다스 CEO로 새로 부임한 비에른 굴덴이 한 말이다.

아디다스와 예의 협업은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최악이었다. 아디다스는 예의 이지에 의존하면서 중요한 혁신도 놓쳤다. 나이키는 온라인 판매를 늘리면서 유통구조를 혁신했다. 이른바 D2C 유통이다. 요즘처럼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엔 대리점을 통한 판매보다 효율적이다. 나이키는 이걸 지난 10년 동안 차근차근 준비했다.

반면 아디다스는 꼭 필요한 유통개선을 미뤘고 그걸 예의 이지 실적으로 포장했다. 결국 이지가 무너지자 아디다스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유통방식은 올드하고 제품혁신은 예한테만 의존해왔던 현주소 말이다.

새로운 아디다스의 경영자인 비에른 굴덴은 과거 형 루디가 창업한 푸마를 살린 전문경영인으로도 유명하다. 브랜드 정체성을 잃고 헤매던 푸마를 턴어라운드시켰던 주역이다. 형에 이어 이제 동생 아디의 아디다스를 구하러 왔다.

 

- 신기주 더 밀크 코리아 부대표

 

카니예 웨스트

카니예 웨스트가 디자인한 운동화인 이지(Yeezy)는 아디다스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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