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사이트] 백화점 공식 깬 정지선 회장
‘도심 속 공원’컨셉트로 화제 만발
공간 절반, 매장 대신 휴식처 조성

고객 발길 뜸한 입지 선정도 파격
재미·편의 다 잡아 ‘핫플레이스’로

‘백화점’빼고 ‘업의 본질’재정립
M&A로 제조·플랫폼 기반사업 가속

최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더현대 서울을 방문했다. 더현대 서울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현대백화점그룹이 야심차게 지난 224일 개점한 신규 백화점이다. 오픈 한달 만에 1100억원이라는 매출을 올리면서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오프라인 매장의 진가를 발휘했다고 긍정 평가를 받는 중이다. 올해 1조원 매출 돌파도 관측된다.

정용진 부회장이 신세계백화점의 경쟁사인 더현대 서울을 방문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곳의 상징성을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 부회장은 방문 사실을 스스로 알렸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지난 18일 다음과 같이 올렸다. “투데이 이즈 배카점데이 #신강 찍고 #신영 찍고 #현여에서 마무리.” 게시글과 함께 정 부회장은 더현대 서울 내부를 배경으로 셀프 카메라도 담았다.

정 부회장이 약어로 쓴 신강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신영은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을 뜻하는 표현이다. ‘현여는 현대백화점 여의도인 바로 더현대 서울을 뜻한다. 정 부회장이 자신의 대표 점포인 두 곳을 둘러보고 현대백화점을 찾았다는 건 무언가 벤치마킹할 장점과 그럼에도 개선해야할 리스크를 살피기 위함일 것이다.

더현대 서울은 지하 7~지상 8층으로 영업면적만 89100. 규모는 서울 최대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컨셉은 도심 속 공원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쇼핑하는 백화점이 아닌, 산책하는 백화점의 이미지를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매장의 몰락을 뒤집다

스마트폰의 전 세계 확산과 모바일 생활 트렌드가 보편화되면서, 현실의 공간보다 가상의 공간(인터넷)에서의 쇼핑이 대세가 되고 있다. 특히 미국 유통업계에는 최근 상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2017년 미국의 대형 유통기업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대거 폐점하고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등 오프라인 매장의 몰락이 시작됐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위기감이 불어닥쳤다. 특히 코로나192020년 연초부터 확산되면서 온라인 유통업은 연일 급성장하고 반대 급부로 오프라인은 서서히 하강하는 추세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뒤집는 오프라인의 새로운 이정표를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더현대 서울을 통해 이뤄냈다.

정지선 회장은 오프라인 출점에 있어서는 매번 공격적이다. 특히 이번 더현대 서울의 입지인 여의도는 유통업계에서는 난해한 곳으로 유명하다. 여의도는 업무지구다. 5일 업무를 하게 되면 보통 업무지구는 주말에 유령도시처럼 썰렁하다. 인적도 드물고 차량통행도 급격히 줄어든다. 여기에 백화점을 짓는다는 건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정지선 회장은 더현대 서울을 통해 대형 오프라인 매장의 기존 공식을 하나씩 깼다. 먼저 집객이 어려운 업무지구에 서울 최대 규모 백화점을 지었다. 백화점 공간을 구성할 때는 창문을 만들지 말 것’ ‘시계를 보이지 않게 할 것과 같은 규칙도 타파했다. 더현대 서울을 가보면 천장이 유리다. 천장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층에 쏟아진다.

정 회장의 역발상은 휴식공간에서 돋보인다. 더현대 서울의 전체 영업면적 가운데 매장 면적을 절반만 확보했다. 여의도의 노른자 땅에 지은 백화점인데, 절반의 공간은 실내 조경과 전시물 그리고 고객들을 위한 벤치로 채웠다.

백화점 사업에서 불문율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매장 면적과 매출은 비례한다는 것이다. 더현대 서울은 절반의 매장 공간을 과감히 포기했다. 일반 백화점의 사장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결정이다. 고객들은 쇼핑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체험하기 위해 더현대 서울을 방문한다. 그 체험이 공간이 주는 안식일 수도 있고, 플래그십 스토어일 수도 있고, 하다 못해 놀러온 사람들일 수도 있다. 더현대 서울은 요즘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핫 플레이스.

이정도면 더현대 서울을 백화점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렵다. 2021년에 등장한 더현대 서울은 과거의 백화점과 미래의 백화점의 중간 모습을 절묘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역사적 갈림길에서 유통공룡이 살아날 또 다른 모델을 제시했다. 몰락의 길에 접어든 오프라인 매장에 새로운 희망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유통기업인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 회장의 경영철학과 닮았다. 제프 베조스는 이렇게 강조했다. “앞으로 생존가능한 오프라인 매장은 딱 두 종류입니다. 재미있거나 아니면 고객에게 편의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더현대 서울엔 재미와 편의가 모두 담겨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미래 전략은

더현대 서울은 현대백화점그룹의 미래사업 비전을 몸소 설명하는 대표작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이제 백화점 사업만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해석된다. 일단 브랜딩부터 달라졌다. 신규 점포는 보통 자신의 대표 기업명을 넣기 마련이다. 더현대 서울은 현대백화점 여의도가 돼야 한다. 현대백화점이라는 고유 브랜드는 전통과 신뢰와 파워가 고루 담겨 있다.

아무리 혁신적인 실험이라고 해도 이름을 개명하면서까지 사업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더현대 서울은 현대백화점그룹이 과거와 다른 내일을 꿈꾼다는 걸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SK그룹은 과거 선경직물이 사명이었다. CJ그룹은 제일제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현대백화점은 이제 새로운 현대백화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더현대 서울이 그 출발인 것이다.

사명에서 현대백화점그룹의 혁신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올해 1월초 정지선 회장이 발표한 그룹의 중장기 전략을 보면 된다. ‘현대백화점그룹 비전 2030’이라는 비전발표를 통해 그룹 전체에 다음 두 가지 키워드를 전파했다. 바로 제조플랫폼이다. 이 제조와 플랫폼은 추상적인 외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제안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연초 비전발표에서 실제로 그룹 사업 방향성에 맞는 유망사업 진출을 명확히 정의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생활문화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새로운 목표다. 이를 위해 사업의 두 축이 될 제조 기반 사업으로는 뷰티, 헬스케어, 바이오, 친환경 등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플랫폼 기반 사업은 헬스케어와 고령친화, 교육엔터, 풀필먼트 등을 아우르겠다고 자신했다.

이러한 비전전략은 10년 전인 2010년에 발표했던 비전 2020’ 세부 전략에 깨달은 교훈도 반영됐다고 본다. 당시 비전에서는 현대백화점그룹이 금융, 건설, 환경, 에너지 등으로 확장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 사업을 추진했다. 문제는 그룹의 뿌리인 백화점 사업과 별 연결고리가 없는 사업이었고, 그래서인지 과감한 인수합병을 했어도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비전 2030은 본업이 무엇인가를 오래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제조와 플랫폼은 현대백화점의 주력사업과 맥을 같이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미 관련 인수합병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인수한 기업들을 보면 디지털방송인 딜라이브’, 인테리어 기업 한화L&C’, 기능성 화장품기업 클린젠 코슈메티칼를 비롯해 SK바이오랜드, 이지웰 등을 품에 안았다. 이때 인수합병의 주체를 살펴봐야 한다. 현대홈쇼핑과 현대그린푸드가 중심축이다. 현대홈쇼핑은 한화L&C의 인수 주체였으며 현대홈쇼핑의 종속기업인 한섬은 클린젠 코스메슈티칼을 인수했다. 현대홈쇼핑 산하 현대벤처스도 현대바이오랜드 인수주체로 섰다.

현대그린푸드도 복지몰을 운영하는 이지웰을 2020년 하반기 인수하며 인수합병에 나섰다. 현대그린푸드는 과거 현대리바트와 에버다임 인수로 이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현대그린푸드는 올초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중국 급식사업도 인수했다. 본업인 백화점 사업의 혁신 경험은 고스란히 현대백화점면세점을 통해 면세점사업의 기반강화와 연결된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앞으로 제조와 플랫폼 분야에서 다양한 인수합병을 시도할 때 백화점과 면세점 사업에 집중하는 현대백화점 대신에 현대홈쇼핑 및 산하 계열사와 현대그린푸드가 인수합병의 주체로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대홈쇼핑과 현대그린푸드는 지배구조상 현대백화점그룹의 혁신을 도모하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이는 추후 현대백화점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현대백화점그룹은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의 형제경영으로 유지해 왔다.

이제 장기적인 비전을 수립하기 위해 계열 분리가 이뤄질 것이고, 이에 따른 독자노선이 강화될 것이다. 이때 그룹의 재편이 현대홈쇼핑과 현대그린푸드를 중심으로 될 것이라는 게 증권가의 분석이다. 따라서 더현대 서울의 성공은 그룹의 미래 비전과 재편에 있어 중요한 화수분이 될 것이다. 더현대 서울로 촉발된 현대백화점 그룹의 ‘2030’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 차병선 기업전문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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