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는 ‘봄비’라고 부르짖으며 아우성치고 있다. 계절변화 없는 2월 어느 날,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보면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싣는다. 하냥 봄을 기다릴 수 없는 마음에 거제도로 향한다. 남녘에 발 내딛으면 바닷속 깊은 곳에서 달려올 바람 속에서 봄바람 한줌이라도 가슴에 담을 수 있겠지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서. 차창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긁어내는 윈도우 브러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이슬 속에서도 봄을 그려본다. 그리움이다. 진한 애수가 느껴지는 핏빛 동백꽃. 비에 젖은 동백꽃이라도 만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리움이 잠시 정지될까? 동백꽃을 떠올리면서 지심도를 먼저 생각한다. 아름드리 동백이 밀생해 일명 ‘동백섬’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비 오는 섬에 피어난 동백꽃잎에 풀지 못한 그리움을 던져 주고 오리라.

거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른 아침을 맞이한다. 시내는 희뿌연 안개가 뒤덮고 있다. 추적추적 하루 종일 비가 내릴 태세다. 비가 그치길 기대하지 않았다. 연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사실은 운전 내내 들었던 일기예보다. 일명 동백섬이라 불리는 지심도를 찾는 날은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더라도 배는 운항된다는 토박이말만 믿고 장승포로 향한다. 지심도와 장승포를 운항하는 작은 배. 섬을 잇는 배를 도선이라고 하는데 섬사람들의 요긴한 교통수단이다. 시내로 말하면 버스라 칭할 수 있다.
첫배가 오전 8시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선(055-681-6007)에 전화를 했더니 8시30분에 출발한단다. 거제 시내에서 장승포까지 30여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서둘러 선착장으로 향하지만 초행이라 배 찾기가 쉽지 않다. 선장은 연거푸 전화를 해대고 있다. 이리저리 선착장 찾아 헤매는 바람에 얼추 9시가 다 되었지만 선장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지 기다려주고 있다. ‘전화비도 안나오겠네’ 부산하게 카메라만 겨우 챙겨들고 뱃길에 들어서는 뒤통수에 내뱉는 선장 말이다. 차라리 그냥 떠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중에 지심도에 도착해 발이 묶였을 때 수도 없이 생각했던 말이다.
도선료는 왕복 7,000원. 소요시간 20여분. 첫배를 시작으로 오후 12시30분, 4시30분 등 하루 3차례 출항. 섬이라는 것이 낚시가 아니고서는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곳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오후나 저녁 배를 타고 나올 요량이었다.
자리를 추스르고 앉아 선실을 살핀다. 젊은 여성 두 팀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배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파도다. 심한 파도에 머리가 어질어질 멀미가 심해진다. 영덕 왕돌잠 갈 때도 이런 뱃멀미를 느꼈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채 돌아 나온 것을 생각하면서 속을 다스린다. 파도에 몸을 맡기려고 했지만 손잡이를 잡은 손엔 쓸데없는 힘이 들어간다. 섬에 도착할 때까지 다행히 토하진 않았다.
낮 배를 타고 나갈 거라는 말을 했지만 선장은 지금 상황으로는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단다. 지갑도, 소지품 하나 챙겨오지 않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망연자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인데 해결책은 있으리라는 배짱은 오랜 여행경험 덕분일 것이다.
섬에 들어온 이상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모두 초행인 듯하다. 예약한 민박손님을 기다리는 섬 주민을 따라 길을 오른다. 울창한 동백군락지가 휘어진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꽃망울을 땅에 뚝뚝 떨어트린 동백꽃과 나무에 피어난 것들. 흐물흐물 피던 동백도 갑자기 밀어 닥친 한파로 다시 고개를 접었고 피어난 꽃들도 검은 반점이 생겼다. 그래서 흐드러져 미쳐버릴 것처럼, 숨 막힐 정도의 기쁨을 만끽하기는 미흡한 꽃이지만 지금처럼 꽃 귀한 계절에 보는 일이라 기분은 상그럽다.
초행의 미개척지의 길을 따라 한발자욱씩 발길을 옮긴다. 비슷하게 구부러진 동백길을 따라 걷는다. 추적추적 이슬을 흩뿌리듯 떨어지는 비가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국방부 소속의 연구원을 따라 가니 넓은 평지가 나온다. 헬기장이다. 이곳에서는 몸 하나만 움직이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포인트기도 하다. 어차피 이번 여행길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헬기장 옆 좁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햇살 하나도 침범 못할 정도로 빽빽한 동백군락지가 나온다. 이곳은 머지않아 더 멋진 모습이 되리라. 망루를 향한다. 망루에는 정작 정자는 없다. 단지 바다 쪽에 내려서 멀리 동섬을 볼 수 있다. 동쪽 뾰족하게 올라온 바위섬. 지심(只心)이라는 섬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동섬이 있기 때문이리. ‘지심도(只心島)’는 하늘에서 보면 섬의 형태가 마음 ‘심(心)’자 같다고 해서 얻게 된 이름. 점 두 개로 표기하기에 적당한 바위다.
길이 2km 폭 500m의 작은 섬. 1~2시간이면 길은 어느 곳으로 가나 만나게 되어 있다. 간간히 민박집을 만나고 일본집 한 채도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원래 일본의 잔재가 많은 곳이었다. 식민지시절 일본군이 구축한 포대와 활주로, 탄약저장고 등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날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손에 잡힐 듯 나타난다고.
섬 한바퀴 돌고 나니 이내 할 일이 없어진다. 날 좋은 날에는 바닷가에 나가 톳나물, 고동 등을 주울 수 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섬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섬의 생리를 전혀 가늠하지 않은 육지민들의 편리한 생각이었다. 배가 들어올 수 없다는 전갈이 섬 안에 퍼졌다. 민박을 정하기로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집은 한목민박(055-681-6901)이다. 섬을 헤매고 있을 때 나와 준 주인의 ‘차나 한잔 하라’는 말에 들어간 방안. 집 주변도 깔끔한 만큼 실내도 포근하다. 어차피 발 묶인 지금, 할 일이 없으면 어떠리.
한번쯤은 봄비에 촉촉이 젖은 작은 섬 안에서 하루를 유하면서 긴 추억을 만들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런저런 이야기로 하루해를 보내고 있다. 워낙 바지런한 여주인은 이브자리 하나에도 여간 신경 쓰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는 말에 차려낸 밥상도 먹음직스럽게 넉넉하다. 방안에 들어앉아 있으니 섬 안이 손바닥이다. 16가구가 들어선 섬 안은 서로 긴밀도가 높다. 모두다 민박을 치고 있어서 ‘밥그릇’싸움도 만만치 않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뻔한 일.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동백섬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일치감치 선창에서 사온 자연산 굴과 해삼 몇 조각을 술안주 삼아 이야기꽃을 펼쳐놓는다. 바로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취기가 오르면서 눈은 손만 뻗으면 가까이에 있는 장승포구의 불빛에 다가가 있다. 내일은 나갈 수 있겠지. 섬에 온지 하루 만에 육지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애당초 섬 생활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 다음날도 배가 뜨지 못한다는 전갈에 가슴 졸이고 있다가 겨우 낮 배로 나올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파도를 보면서 내내 아찔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난 이날의 밤을 멋진 추억으로 기억할 것이다. 보름정도만 지나도 지심도는 한없이 멋져 질 것이다. 아마 그날의 폭풍을 금세 잊고 다시 배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촉촉이 봄비에 젖은 그 밤 추억에 물들은 지심도를 향해서.
■자가운전:대전-통영간 고속도로-사천IC-사천읍에서 왼쪽 33번 국도이용-고성-14번 국도-통영-거제읍내-장승포항에서 도선 이용.
■별미집과 숙박
거제도에서 회를 제대로 먹으려면 성포면에 있는 평화횟집(055-632-5124)을 기억하면 되고 해물탕은 장승포항 수협 옆에 있는 항만식당(055-682-3416)이 괜찮다. 또 동부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만나는 옥바위 굴구이(055-632-7255)에서는 굴밥이 괜찮다. 또 ‘시인의 마음’(055-633-0260)이 운치있다. 숙박은 거제읍내를 이용하면 되며 지심도에서는 한목민박집은 충분히 추천할만하다. 또 거제도 고현의 해수온천(055-638-3000)의 시설이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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