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 볶는 부부방앗간

정직한 방앗간, 28년 한 자리

경기도 시흥 도일시장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28년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깨 볶는 부부방앗간’이 있다. 이름 그대로다. 1993년, 갓 결혼한 신혼부부였던 심태규·장지연 대표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시흥에 자리를 잡고 방앗간을 열었다. 고향 태백을 떠나 낯선 곳에서 당당히 홀로 서보겠다는 패기가 더해진 새 출발이었다. 도일시장도, 방앗간도 익숙지 않았던 그들에게 첫 몇 해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은행원 출신답게 꼬박꼬박 가계부를 썼거든요. 하루 매출이 1만원도 안 되는 날이 많았죠. 돈이 없어 쌀을 이틀에 한 되씩 사먹던 시절이었어요.”

그 어려운 시절도 추억이 될까싶어 보관해둔 장지연 대표의 가계부에는 잘게 쪼개 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힘들었지만 요령 피우지 않고 묵묵했던 부부에 손을 내민 건 방앗간 위층에 살던 건물주 어르신이었다.

“3년 정도 지났을까요. 다시 태백으로 돌아갈까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어요. 어두운 표정이 맘에 걸렸는지 위층 어르신이 사정을 묻더니만 ‘내가 힘 좀 써볼게’ 하시더라고요. 그냥 빈말인줄 알았죠. 그런데 이후부터 정말로 손님이 늘기 시작했어요. 지역 기반이 탄탄했던 어르신이 저희 방앗간을 이용해달라고 주변에 말씀을 해주신 덕이었지요.”

심태규 대표는 당시를 떠올리면 여전히 울컥하다. 젊은 사람이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된다고 다독이던 어르신의 진심이 힘들 때마다 부부를 붙들어주었다. 28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제는 이 모든 사연을 잘 알고 있는 두 아들 심대보, 심석보 씨가 부모님과 함께 방앗간의 대를 잇고 있다.

좋은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온 방앗간이기에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키는 것도 고객들과의 중요한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마침 ‘깨 볶는 부부방앗간’은 올해 도일시장 최초로 중소벤처기업부 인증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다. 늘 단란하게 깨를 볶는 부부와 든든히 후계를 책임지는 의좋은 형제가 함께하는 방앗간은 언제 찾아도 참 고소하다.

참기름, 세계 시장을 노리다

도일시장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신지 28년이 되었습니다. 방앗간은 기계와 기술이 함께 필요한 업종인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심태규 고모님이 시골에서 방앗간을 하셨거든요. 시장에서 수완 좋은 방앗간으로 통했기에 오고가며 배우는 점이 많았지요. 방앗간은 매력적이었지만 지인들이 많은 고향에서 시작하고 싶진 않았어요. 제대로 독립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도일시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장 장사라는 게 서로서로 아무개 가게에서 팔아주자며 이끌어주는 면이 있잖아요. 저희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리 잡기까지 쉽지 않았지요.

시작은 어려웠지만 ‘백년가게’로 선정될 만큼 꾸준히 가게를 이어왔습니다. 비결은 무엇일까요?

심태규 도움 주신 분들이 많지요. 건물주 어르신이 가게가 정체되어 있을 때 손님이 모일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셨고 20년 동안 세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어요. 받은 만큼 보답하는 마음으로 방앗간을 정직하게 운영하다보니 한곳에 잘 뿌리내리게 된 것 같아요. 그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방앗간 앞에도 ‘정직하고 성실하고 거짓 없이 만들었습니다’라는 문구를 새겨두었지요.

장지연 믿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 같아요. 현재 들기름, 참기름, 고춧가루, 미숫가루 선식 등 취급하고 있는데요. 좋은 깨를 구하기 위해 남편이 지방 곳곳을 다니면서 사들이고 있습니다. 미숫가루에는 율무, 귀리, 보리 등 20가지 곡물이 들어가는데 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산 재료를 직접 엄선하여 쓰고 있습니다. 저희 기름이나 미숫가루를 한번 맛보고 재방문하는 고객이 많아요. 다른 곳에서는 이 맛이 안 난다고 하면서요. 먹을거리를 만드는 곳인만큼 청결도 자신합니다. 방앗간을 열자마자 쓸고 닦는 것부터 시작하거든요. 26~28년 된 기계인데도 반질반질 참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지요.

‘깨 볶는 부부방앗간’이라는 센스있는 상호부터 세련된 제품 패키지까지 보통의 시장 방앗간과는 차별화된 부분이 많습니다. 빛깔부터 다른 생참기름도 낯설고요.

장지연 원래는 ‘시골방앗간’이었는데 5년 전 쯤 지인 분이 부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이 좋다면서 ‘깨 볶는 부부방앗간’이라는 이름을 선물해 줬어요. 사실 저희는 품질에만 신경을 썼지 포장에 신경을 쓰거나 다양한 경로로 판매할 줄은 잘 몰랐는데요. 아들 둘이 방앗간 일에 뛰어들면서 병 모양과 포장도 신경쓰고, 판매처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심태규 생참기름과 생들기름에는 저희 방앗간만의 특화된 노하우가 담겨있어요. 국산 깨는 가격이 비싸 서민들은 부담스러워 하잖아요. ‘수입산 깨로도 맛좋은 기름을 짤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볶는 온도부터 압착까지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시도를 해봤죠. 그 과정에서 깨 본연의 향을 살린 생기름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수입은 국산처럼, 국산은 명품처럼 맛의 급을 올리게 되었죠. 빵에 찍어 먹거나 샐러드 드레싱으로 활용할 만큼 기존 기름과는 맛이 확연히 다릅니다. 맛은 정말 자신 있어요.

지금껏 맛보지 못한 생참기름의 풍부한 맛과 향에 놀랐습니다. 30년 가까이 방앗간을 운영하다보면 안주하기가 더 쉬울 텐데 늘 새롭게 연구하고 도 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특히 20대인 아드님이 일찌감치 함께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심대보 어릴 때부터 방앗간 일을 도왔거든요.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되었어요. 물론 도와주는 것과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기름을 짜는 것은 다르더라고요. 단골손님들이 부모님이 짠 기름만큼 맛있다고 할 때 보람을 느껴요. 물론 아직 배워야할 게 많아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늘 변화하려 노력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오히려 제가 영감을 받지요.

심석보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자연스럽게 본받게 됐어요. 저는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했는데요. 방앗간 일을 익히는 것은 물론 저희 제품을 이용한 요리 상품을 개발하는 데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신선한 식재료로 맛과 영양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제품을 선보여야죠.

2대째 방앗간을 이어가는 아들과 방앗간 창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심태규 인내를 가지고 성실하게 신뢰를 쌓아야합니다. 한곳에 몸담으려면 최소 10년은 버티는 힘이 필요해요. 창업 2~3년까지는 정부의 지원 등으로 버틸 수 있는데 4년째부터는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망하지 않아요. 20~30년을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장기전을 준비하라고 전하고 싶어요.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해요. 세 사람이 모이면 그 중 한 명은 스승이라고 하잖아요. 주변 상인과의 소통과 유대도 놓치지 말아야죠. 저희가 백년가게로 선정된 것 역시 도일시장 상인과 고객들이 모두 도와준 덕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게가 2대로 이어지면서 ‘깨 볶는 부부방앗간’의 꿈도 더 커졌을 것 같습니다.

장지연 저희 방앗간은 멀리서도 많이 찾아주세요. 제주도로 이사를 가신 분이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시고, 해외로 출국할 때 저희 기름을 꼭 챙겨 가는 분도 많지요. 덕분에 사명감이 커졌어요. 우리 전통 음식이 점점 사라지는데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중간 역할을 잘 해야겠다고 말이지요. 나아가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식품을 만들고 싶어요.

심태규 저희 부부만 운영을 하면 여유가 없는데 2세대로 이어진 덕분에 좀더 멀리 내다보게 됐습니다. 해외에 우리 전통 기름과 식품을 알려 외국 가정에서도 쉽게 쓸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참기름으로 대한민국을 알리고, 그 힘으로 도일시장의 명성도 높이고 싶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잘 키워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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