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일찍 서둘러야 했다. 월명암과 솔섬 낙조를 보기 위해서는. 모처럼 부안 여행에 나섰다. 이미 수도 없이 찾아온 이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대표적인 여행지나 찾아서 ‘디카’에 실어두면 되고 꼭 필요한 월명암이나 들러보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늦은 아침을 먹고 부안의 내로라하는 내소사와 채석강 그리고 최근에 짓고 있는 드라마 이순신 세트장을 취재하고 나서 도착한 곳은 월명암 오르는 남여치 매표소였다.

처음 내변산 직소폭포 오를 때는 슈퍼에 들러 산행에 필요한 음식을 미리 사두었지만 이번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낙조를 못 볼지도 모른다. 2km가 약간 넘는 거리. 오르는데만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달랑 카메라 가방만 등짐지고 산행을 시작한다.
이미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떠난 후의 산길은 고요와 정적뿐이다.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깬다. 초입의 계곡 이외에는 계속 오름이다. 약수터가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되기 때문에 물도 아껴 마셔야 한다. 숲이 우거져 발밑 풍광도 볼 수 없다. 발아래로 눈을 떨군 탓인지 간간히 떨어진 ‘꾸지뽕’열매를 발견하고 주린 배를 채운다. 단맛이 나는 빨간 열매. 맛을 보니 먹어서 죽지는 않을 것 같다.
걷고 또 걸으니 관음약수터라는 팻말이 나선다. 물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물속에 부유물이 바가지 위에 떠오르지만 이것만으로도 자연에 감사한다. 절집 경내를 알리는 팻말이 반갑다. 다시 고갯길을 넘어서니 낙조대로 가는 길과 절집 길이 나뉜다. 낙조대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내리막이다. 옴팍한 터를 찾아 절집이 들어앉아 있을 터. 숲이 울창해 한낮에도 컴컴하다. 길은 습하다. 하늘을 향해 오른 담장 너머로 빼꼼히 절집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자리에 노란 상사화가 지천으로 피어났다.
원래 월명암은 가을 여행으로 기획했었다. 그런데 이런 행운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노란 상사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보랏빛을 띠는 일반의 상사화와는 개화시기도 다르고 꽃 형태도 틀리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변산의 위도에 노란 상사화가 자생한다는 말은 나중에 듣기도 했다.
그러면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이곳에 상사화를 심어 놓은 것이 번진 것이 아닐까? 만약 자생했다면 온 산에 상사화가 피어 있어야 했지만 오르는 길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다. 상사화는 원래 계곡 주변, 습한 곳에서 많이 자생한다. 그러니 이곳이 습도가 적당해서 자생한 것인지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절집으로 오른다. 절집은 생각보다 건물이 많았고 중창불사를 하는 중이라 어수선하다.
월명암(변산면 중계리 산 97-1)은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쌍선봉(498m) 아래 옴팍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선운사의 말사다.
월명암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해오다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탄 것을 진묵대사가 다시 중수하고, 헌종 14년(1848)에는 성암화상에 이르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한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1908년에 다시 불타고 말았다. 이후 학명선사에 의해 1914년 다시 세워졌으나 1950년 6.25사변 직전 여순반란군이 이곳에 잠입해 싸우던 중 또 다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954년 원경 스님이 다시 지었고 1996년 중수를 했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시절을 겪은 절집엔 부설거사의 행적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 부설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40호)이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부설전에는 통일신라 신문왕 12년(692) 월명암을 창건했다는 부설거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보기만 해도 왠지 모를 전율이 다가오는 초상화다.
부설이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하던 해 수도인 서라벌 남쪽 항아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 도반인 영조, 영희와 길을 떠나 변산에서 함께 수도생활을 하면서 나눈 법담과 부설거사의 오도송이 기록돼 있고, 사부송과 팔죽시도 함께 기록돼 있다.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선방이라 스님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스님은 한분도 눈에 띄지 않고 절집을 짓는 인부와 노보살, 기도객들 뿐이다. 어수선한 절집. 으레 앞이 트인 언덕 앞으로 발길이 돌려진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내변산의 발아래 풍광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켜켜이 펼쳐지는 산자락이 아스라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봉우리마다 안개가 끼면 아름답다는 변산팔경의 하나인 월명무애(月明霧靄). 그건 이른 아침에나 볼 수 있지 않을는지.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 부안의 인물 ‘매창’이 지은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라는 한시다. 기생이었던 매창의 흔적은 부안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마음을 지체할 틈이 없다. 금방이라도 해가 서해로 들어가 버리면 안 될 일. 부산스럽게 하산해 미리 낙조 포인트를 점지해둔 학생해양수련관으로 차를 향한다.
변산반도 전체가 일몰이 아름답지만 특히 솔섬이 빼어나다. 운이 좋았던가. 부안여행을 배가시켜줄 만한 만족스러운 낙조가 서녘으로 지고 있다. 해가 지고 나서도 하늘은 구름과 노을로 여행객의 발길을 부여잡고 있다.
■대중교통 : 부안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각방향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남녀치 매표소까지는 격포행 직행버스 이용, 변산면 소재지(지서리) 하차. 약 30분 소요.
■자가운전 :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부안IC이용해 부안읍내에서 30번국도 이용하면 된다. 해안도로를 따라 격포-궁항-모항-곰소항-염전-내소사-유형원유허지-개암사-울금바위 등을 한바퀴 돌면 된다. 내변산 산행은 중간 허리 길을 이용하면 된다.
■별미집과 숙박 : 부안에는 백합이 유명하다. 계화회관(063-584-3075)은 외지에까지 알려진 집이고 그외 바지락조개로는 변산온천산장(063-584-4874)이 있다. 강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가족나들객들이 찾아가면 좋을 곳이다. 싱싱한 회는 격포항횟집(063-584-8833)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즐길 수 있다. 곰소항에는 칠산꽃게장(063-581-3470)집의 간장게장도 맛이 좋다. 곰소항 안에 있는 장모집(063-584-3504)은 5천원 정도에 가정식 백반을 즐길 수 있다.
숙박은 변산온천(063-582-5390) 외에도 해안가나 격포쪽에 여러 숙박지가 있다.

◇사진설명 : 낙조 여행지로 이름난 솔섬은 해가 지고 나서도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을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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