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권력가의 이상을 담은 초상

특정 인물의 얼굴이나 모습을 담은 초상화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물의 권세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이 그려졌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예술 후원자를 대상으로 성행한 초상화는 오늘날 당대 역사나 풍속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의 재현을 넘어 인물의 이상까지 담아낸 초상화의 비밀을 살펴본다.

권력의 표상, 초상화

‘셀피’ 시대다. 누구나 한 번쯤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봤을 것이다. 초상화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드러내는 유용한 방법 중 하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진관에서 인물 사진을 찍으면 사진사가 붓으로 보정을 해주곤 했다. 고객의 요청에 따라 얼굴의 점이나 흉터도 없애고 머리카락도 좀 더 단정하게 만들어줬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포토샵 보정이 필수가 됐고,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자신의 초상을 찍고 다양한 앱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쉽게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초상화는 아무나 주문하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값비싼 보석이나 시계, 가구처럼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하나의 사치품 이자 소비재였다. 초상화는 또한 권력의 표상이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위세와 업적을 당대에 과시하는 것은 물론 후대에까지 남기고자 초상화를 주문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몬테펠트로 부부의 초상화>, 1473~1475년 ©Le Gallerie Uffizi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몬테펠트로 부부의 초상화>, 1473~1475년 ©Le Gallerie Uffizi

특히 르네상스 시대 권력가들에게 초상화는 자신의 권세와 위엄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피에로 델레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5~1495)가 그린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의 초상화>는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다. 완벽한 측면으로 그려진 이부부의 초상화는 서로 마주보는 형식의 두 쪽 패널화(캔버스를 대신해 쓰는 화판)다.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부인은 기품 있게 차려입고 남편 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신분을 짐작하게 하는 화려한 목걸이와 머리 장식은 입고 있는 심플한 검정 드레스와 대비를 이룬다. 붉은색 모자와 옷을 착용한 남편 역시 따뜻한 시선으로 부인 쪽을 바라보고 있다. 각각 독립된 나무 패널에 그려졌지만 두 사람 뒤로 펼쳐진 풍경이 서로 이어져 있어 한 쌍으로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부인의 얼굴과 구릿빛 남편의 얼굴이 대비를 이루고 콧등이 내려앉은 남편의 심한 매부리코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화가는 왜 주문자의 외모를 좀 더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정하지 않은 걸까? 정면 모습을 그리는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왜 모델의 옆모습을 그렸을까?

 

용병 출신의 공작, 귀족 출신의 아내

당시 초상화의 주문자들은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게 그리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화가에게 함께 주문했다. 따라서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 부부가 누구며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모습으로 보이기 원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편인 페데리코(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가장 성공한 용병 출신의 공작이다. 16세 때부터 용병으로 경력을 쌓은 그는 19세 때 성 레오 성을 정복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22세의 나이로 우르비노의 군주가 됐고 1474년 용병의 공을 인정받아 로마 교황에게 공작 칭호를 받았다. 그의 첫 용병 계약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이었다. 그는 300명의 기사로 꾸려진 용병부대를 이끌었고 단 한 번도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절대로 무보수로 싸운 적이 없는 그의 몸값은 계속 올랐고 용병전쟁

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우르비노 공국의 경제적 기반을 닦는데 바탕이 됐다.
그는 용병으로서뿐 아니라 문예 후원자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이탈리아의 빛’이라 불릴 정도로 이탈리아 문예부흥에 기여한 후원자였다. 궁을 장식하기 위해 많은 그림을 주문했을 뿐 아니라 글 쓰는 작가들을 후원했고, 바티칸 다음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종합도서 관을 설립하기 위해 수많은 필사본을 수집했다.

아내인 바티스타 스포르차(Battista Sforza, 1446 ~1472)는 몬테펠트로의 두 번째 부인으로 그가 용병으로 일했던 밀라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조카딸이다. 스포르차 가문의 교육 전통에 따라 바티스타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인문교육을 받았고, 특히 그리스와 라틴어에 능통했다. 4살 때 처음으로 라틴어 공개 연설을 했고 라틴어 미사여구에 능통해 교황 비오 2세 앞에서도 연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 조반니 산티가 “모든 은혜와 덕행을 갖춘 처녀”라고 묘사할 정도로 지성과 덕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바티스타는 결혼 후 11년 동안 딸만 6명을 낳은 끝에 첫 아들이자 후계자인 구이도발도를 낳았다. 그러나 같은 해 남편이 전장에 나간 사이 폐렴으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페데 리코는 피렌체의 용병으로 대승을 이루고 돌아왔을 때 득남의 기쁨과 아내를 잃는 슬픔을 동시에 겪어야 했다.

초상화 뒷면에 그려진 <명예의 승리>와 <정숙함의 승리> ©Le Gallerie Uffiz

의미와 상징 부여하는 표현 기법

화가는 플랑드르는 회화와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배운 몇 가지의 독특한 장치들을 이 그림에 사용했다. 우선 바스티아의 얼굴을 유난히 창백하게 표현한 것은 그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데리코의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는 그가 평생을 안락한 궁전 안이 아닌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았던 군인이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콧등이 내려앉은 심각한 매부리코는 감추고 싶은 신체적 결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쟁 때 다쳤던 영광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들인 것이다.

두 초상화가 측면으로 그려진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는 그가 마상시합 때 오른쪽 눈을 잃으면서 생긴 흉한 외모를 감추기 위함이다. 주문자 입장에선 자신의 좋은 면만 보여주기 원했을 것이므로 외모의 결점을 숨길 수 있는 옆면 초상은 화가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들 부부를 이상적이고 기념비적인 인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옆면 초상의 형식은 그리스 메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물과 현실공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인물 표현을 할 때 선호되었다. 완벽한 옆모습으로 그려진 부부는 서로를 응시하되 표정과 몸짓이 모두 제거되어 현실 속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압도적인 크기의 인물과 달리 배경에는 작고 세밀하게 묘사된 먼 풍경을 그려 넣어 모델들의 영웅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동시에 화가는 인물과 의상, 화려한 장신구의 섬세한 표현을 통해 모델의 고귀한 신분과 실제감을 강조하고, 화가로서의 자신의 역량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 부부의 뒤에 펼쳐진 먼 풍경은 무엇일까? 플랑드르 회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새의 시선으로 그려진 풍경은 이 부부가 지배했던 땅을 묘사하고 있다. 부인 초상의 배경은 영토의 경계선이나 초소 건물이 있어 전쟁을 통해 지키고 확장했던 땅을 상징하는 반면, 페데리코 초상의 배경엔 강이 흐르는 조용하고 평온한 마을 풍경이 그려져 있다. 페데리코는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울 때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고, 그 후 우르비노로 돌아가 문예부흥에 힘쓴 점을 화가도 주문자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한쪽 눈이 실명해 더 이상 용병을 할 수도 없었던 페데리코는 부인 사후 성을 장식하기 위해 많은 그림들을 주문하고, 도서관을 짓기 위해 최고의 필사 전문가들과 편집자들을 고용하는 등 우르비노의 문예부흥에 힘썼다.
또한 우르비노 시민들의 행복을 알고자 호위무사 없이 상점들이 있는 우르비노 거리를 산책할 정도로 자애로운 군주였다. 병사들의 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특히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잘 챙겼다. 또 병사들의 딸들에게는 결혼 지참금도 챙겨줬다. 이런 병사들의 복지에 대한 헌신으로 그의 병사들은 충성심이 매우 깊었고 사기가 높았기에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군인이었지만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역사와 철학책을 가까이했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탐독했으며, 그가 통치하던 우르비노는 옛 그리스 도시처럼 신분에 상관없이 평등했다고 한다.

염원 깃든 사실적 표현

프란체스카처럼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주문자의 초상을 실물과 닮게 사실적으로 재현해내기 보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기 원하는지를 잘 읽어내고 표현해야 했다. 후원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눈과 이를 화폭에 잘 구현해 내는 역량을 가진 예술가만이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editor 이혜영 · 자료제공 한국메세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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