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윤(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오동윤(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6세기 백성의 가장 큰 부담은 공물이었다. 공물은 조정이 각 지방의 특산물을 지정하고 수취하는 제도다. 일종의 납세다.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공물은 바쳐야 했다. 생산하지 않는 공물을 배정하기도 했다. 이럴 땐 관리나 상인이 공물을 대신 내줬다. 그들은 백성에게 그 이상을 받아냈다.

1608년 정해진 양의 곡물로 공물을 대신하는 대동법을 실시했다. 백성의 부담을 덜 고자 했다. 전국으로 확대하고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100년도 더 걸렸다. 대동법도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성의 부담은 여전했다. 납세의 의무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거둬들인 곡물은 상인에게 전달됐다. 상인이 시장에서 공물을 조달했다. 이런 상인을 공인이라 했다. 공인들은 종이, 기름, 어물, 소금, 가죽 등을 구매했다. 공인들은 취급하는 재화에 따라 공계를 조직했다. 공계는 정해진 수량의 재화를 정해진 시일에 조달했다. 이때 지급한 조달 가격을 공가라 했다. 공가는 시장가보다 세배나 비쌌다. 이유는 일정 수량과 품질의 재화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공계는 더는 성장하지 못했다. 공계는 해당 재화를 독점해 이윤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조를 하는 산업자본으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 납품처인 왕궁이 가공품보다 원료 구매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공계는 이윤은 축적했지만, 기술은 축적하지 못했다.

이후 뚜렷한 증거는 찾을 수 없지만 공계는 조합의 형태로 발전한다. 1940년대 조합은 양적 팽창을 경험한다.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으로 기업은 생산 원료가 부족했다. 총독부는 공급 창구를 지정해 부족한 원료를 배분하려 했고, 조합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가내 공업자나 신규 공장이 조합에 가입했다. 1940년 공장은 7142개였으나 불과 3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조합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증가한 공장 수만큼 조합의 회원이 증가한 것은 확실하다.

한편, 당시 조합은 기업정비령을 수행했다. 총독부는 통제를 위해 기업을 정비하려고 했다. 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노림수였다. 정비의 수단은 기업의 업종 전환이나 합병이다. 총독부는 이를 조합에 일임했다. 강제성이 없어 정비령은 흐지부지 끝났다.

드디어 196112월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됐다. 1961년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19616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출범했다. 최고의 통치기구다. 당시 일부 군부 세력과 경제학자들이 성장전략을 세웠다. 농업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점진적 성장을 꾀했다. 그래서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제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통화개혁이 실패하면서 정책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중소기업과 협동조합도 움츠러들었다. 대신 이병철 회장이 주도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대기업이 성장의 페달을 밝게 된다.

협동조합은 1965년 단체수의계약으로 활로를 찾았다. 비록 단체수의계약 제도는 2007년 폐지됐지만, 지난 40년 협동조합의 역사와 함께했다.

지금은 협동조합 추천 소액 수의계약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소액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인건비 등 비용 상승이 가파르다. 원가 계산, 계약 규모 확대 등 대수술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계를 보더라도 협동조합은 업종에 기반한다. 지역별 협동조합이 있지만, 이도 어디까지나 기반은 업종이다. 시장 변화 속도가 엄청나다. 소비자는 뛰고 있고, 기술은 날고 있다.

중소기업이 기업 단위로 모든 기능·연구개발, 제조, 유통, 마케팅 등을 수행하기 어렵다. 기능의 경쟁력을 보유한 기업이 각자의 기능을 협업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업종과 기업을 잘 아는 협동조합만이 협업을 만들 수 있다. 기능별 협동조합의 탄생이 멀지 않았다.

 

-오동윤(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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