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실세에 휘둘리고 파생상품 손댔다 '빚더미'

‘쥐꼬리 지분’이 빚은 CEO리스크

지난해 11월12일이었다. 드디어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부가 현대그룹 관련 업체 몇 군데를 압수수색했다. 1년 가까이 이어져온 검찰 금조부의 검이 마침내 현대그룹을 치던 날이었다. 그런데 금조부의 검끝이 맨 먼저 겨눠진 곳이 엉뚱했다. 황두연 ISMG코리아 대표란 인물이었다. 황두연 대표는 현대그룹 안에서 아무런 공식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금조부는 황두연 대표야말로 현대그룹 관련 비리의 핵심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까지 상관 없는 외부인이 현대 정도의 명문 그룹을 좌지우지한 건 전례가 없다. 검찰조차 새삼 낯설어할 정도다.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황두연 대표의 그림자가 현대그룹 연남동 사옥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황두연이 누군지 모르는 현대그룹 직원이 없을 정도다. 현대증권 노조가 지난 3월 황두연 대표를 검찰에 고발한 것도 그래서였다. 현대증권 노조는 황두연 대표가 현대저축은행 인수를 주도했고 현대그룹 비자금 조성에 직접적으로 간여했다고 주장했다. 또 현대증권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작업도 벌였다고 주장했다. 황두연 대표가 그룹 내 비선 경영의 실세란 얘기다. 실제로 검찰은 황두연 대표가 현대종합연수원 건립 과정에서 하청 업체에 공사대금을 부풀려 지급했다가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잡은 걸로 알려졌다.
정작 현대그룹한텐 검찰 수사보다도 더 심각한 경영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수천억 원 대 파생상품 손실 더미에 오를 판이기 때문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다. 이미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12월17일 기준으로 4450억 원대 파생상품 평가손실을 기록한 걸로 나타났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이 사실을 제대로 명기하지 않은 채 금융 당국에 신고했다가 재신고를 요구받았던 걸로 알려졌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파생상품 손실을 입은 이유는 2006년 현대그룹을 둘러싼 경영권 다툼 탓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중공업그룹과 경영권 싸움을 벌였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그룹의 기둥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대신증권과 넥스젠캐피털 같은 9군데 금융사와 파생상품 계약을 체결했다. 금융사들은 현대상선 주식을 사들여서 현대그룹의 백기사 역할을 해줬다. 대신 일정 기간이 지나 주식을 되팔 때 주가가 떨어져 있으면 현대그룹한테 손실 보존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지금 해운업 경기는 바닥이다. 당연히 현대상선 주가도 바닥이다. 파생상품 첫 만기는 내년이다. 2017년까지 차례로 만기가 도래한다.
지금 현대그룹은 내우외환이다. 내부에선 비선 경영 논란으로 시끄럽다. 외부에선 빚쟁이들이 아우성이다. 사실 현대그룹이 이렇게까지 수세에 몰린 이유는 자명하다. 최고경영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다. 황두연 대표에 대한 현대그룹 내부의 증언은 한결같다. “현정은 회장은 여자 회장이라고 불렸고 황두연 대표는 남자 회장이라고 불렸다.” “지난 몇 년 동안 황두연 대표가 사실상 현대그룹을 경영해왔다.” 일부의 풍문이라고 해도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장악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다.
지배구조상으로도 그렇다.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은 뭐니뭐니해도 현대상선이다. 현대그룹이 사실상 현대상선그룹이라고 불리는 연유다. 현정은 회장이 가진 현대상선 지분은 고작 1.62%에 불과하다. 차라리 현대상선 임직원들이 투자한 현대상선우리사주의 지분이 더 클 지경이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현대엘리베이터를 지배하고 있어서다. 현대엘리베이터를 갖고 현대상선까지 지배한다. 사실 그걸로도 불안한 지경이었다. 현대중공업이 지닌 현대상선 지분도 만만찮아서였다. 결국 금융사들과 무리한 파생상품 계약까지 맺어야 했다. 그러다 현대엘리베이터를 위험에 빠뜨렸다.
사실 이건 현대엘리베이터 주주들로서는 울컥할 노릇이다.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지켜내느라 우량한 현대엘리베이터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생겼으니 말이다. 실제로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인 스위스 쉰들러 홀딩스AG가 현정은 회장을 상대로 550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게 현정은 회장의 기업 장악력에서 비롯된 문제다. 취약한 지분으로 전체 그룹을 지배하려다보니 새는 구멍이 많았다. 이걸 메우려다 무리를 했다. 그룹 경영권을 방어하려고 계열사 주주들한테 손실을 입혔다. 회사 내부에 비선을 둬서 기존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기업의 의사 결정 라인에 비선이 있다는 건 밖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경영 판단을 내려야하는 순간이 있다는 뜻이다. 현대그룹의 내우외환은 결국 최고경영자 리스크다.

신기주(경영전문칼럼니스트 · 「사라진 실패」 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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