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게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씀이다. 이 글귀를 집무실에 써놓고 틈날 때마다 읽던 최고경영자가 있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이다.
철길을 등에 지고 있는 상암동 팬택 본사는 흡사 배수의 진을 친 형국이다. 박병엽 부회장은 그곳에서 정말 이순신처럼 백의종군했다. 2007년 팬택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4000억원의 팬택 주식과 전재산을 내놓았다. 다시 4분기 연속 적자가 나자 박병엽 부회장은 자기 연봉부터 줄였다. 부질없었다. 박병엽 부회장은 지난 9월24일 끝내 팬택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그동안 박병엽 부회장과 팬택은 전술적으론 스물 세번 싸워서 스물 세번 이겼다. 팬택은 삼성전자보다 먼저 안드로이드폰 개발에 뛰어들었다. 덕분에 팬택은 2012년까지 17분기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갔다. 미국 퀄컴사가 팬택한테서 받아야하는 로열티를 출자전환 하도록 만들었다. 삼성전자한테도 지분 10%를 팔고 530억원을 투자받았다.
정작 팬택의 위기는 전술이 아니라 전략에서 왔다. 팬택이 2007년 워크아웃에 들어가야 했던 것도 전략적 패배 때문이었다. 모토로라의 레이저폰은 중저가폰 시장에 집중하던 팬택한테 치명상을 입혔다. 그 무렵 휴대폰 기술 혁신은 정체되고 있었다. 디자인과 마케팅이 전략적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은 기술이 아니다. 유행이다. 어떤 디자인을 유행으로 만들려면 전세계적인 자원이 필요하다. 모토로라한텐 그게 있었다. 팬택한텐 없었다.
이번 위기의 원흉도 그 때와 닮았다. 스마트폰의 기술적 혁신은 끝나가고 있다. 스마트폰은 소비자들한테 신기하지 않다. 기능면에선 평준화됐다. 다시 마케팅과 브랜드가 전략적 화두다. 피처폰에선 디자인이 전략적 변화를 만들었다면 이번엔 한 회사의 여러 가지 스마트 기기를 하나처럼 묶어서 쓸 수 있게 해주는 클라우드 컨버전스가 관건이다. 결국 소비자를 가두리 양식하는 셈이다. 이러면 팬택의 몫은 또 없다.
박병엽 부회장은 존경받아 마땅한 최고경영자다. 4000만원 전세금으로 팬택을 일군 중소기업계의 신화다. 그래도 패장이다. CEO는 전술적 승리도 거둬야 하지만 기업이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 박병엽 부회장은 끊임없이 전술적 승리로 전략적 열세를 극복해보려고 했다. 박병엽 부회장은 명분에도 매달렸다. “한국에서도 중소기업 브랜드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낡은 열두척 배로 133척의 왜군을 막아내는 명랑해전은 한 편의 드라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들어 죽어서 임진왜란이 유야무야 끝난다는 이야기엔 드라마가 없다. 그래도 기업과 세상의 운명은 이런 재미 없는 전략이 바꾼다.
기업 경영은 전쟁과 닮았지만 전투와는 다르다. 기업 경영에선 전술적 승리처럼 보이는 것도 실상 전략적 성취인 경우가 많다. 퀄컴이 출자전환을 한 건 팬택이 무너지면 로열티를 떼일 뿐만 아니라 구매처도 하나 잃게 돼서다. 팬택은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전기, 삼성SDI의 VIP고객이다. 지금까지 팬택이 삼성으로부터 사들인 부품 값만 8000억원이 넘는다. 팬택이 생존하는 게 삼성한테도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전술과 전략 사이의 혼동은 박병엽 부회장뿐만 아니라 많은 최고경영자한테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박병엽 부회장처럼 창업자인 경우 전술적 승리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쉽다. 전략적 열세를 전술적 승리로 극복하는 과정이 곧 자수성가이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가 전략과 전술의 승패 확률을 혼동하기 시작하면 그 때가 진짜 위기다. 특정 기업을 인수해서 위기를 돌파한다거나 특정 제품을 성공시켜서 상황을 호전시킨다는 건 전술적 승리일 뿐이다. 팬택이 그랬다. 스마트폰 시장이 정체되자 팬택은 신제품 베가 아이언에 올인했다. 애플조차 실패한 메탈 바디를 구현해낸 역작이었다. 기술적으론 뛰어났어도 소비자들한텐 또 하나의 스마트폰일 뿐이었다. 기술력이라는 전술적 기동성은 경영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기업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전투에선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에선 진다.
전략적인 경영자라면 전략적 우위가 무엇인지부터 가늠해야 한다. 필요하면 해당 기업과 소속 임직원이 더 나은 전략적 위치에 설 수 있도록 기업을 매각할 수도 있다. 기업을 팔아서 돈으로 바꾸라는 얘기가 아니다. 기업이 승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단 얘기다. 기술M&A가 빈번한 미국 IT 벤처생태계에선 흔한 일이다.
임전무퇴는 상무 정신이지 기업가 정신이 아니다. 슬픈 충무공의 후예가 될 뿐이다.

신기주(경영전문칼럼리스트 「사라진 실패」 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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