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산 높고 물 맑은 오대산 자락이다. 연어와 뱀장어가 거슬러 오른다는 연곡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늘 푸른 바다도 지척이다. 지금쯤 고향집 둔덕에는 봄빛이 가득할 것이다. 진달래가 지고 나면 어김없이 얼굴을 내미는 살구꽃과 복사꽃, 그리고 배꽃과 앵두꽃이 집 둘레를 단장하고 있을 테지.
고향을 떠난 지 어언 25년. 해마다 이 무렵이면 고향집 정경이 삼삼히 그려진다. 봄물 든 산천은 내 어릴 적 추억을 새록새록 샘솟게 하고, 여기저기 다투어 피어난 꽃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애틋해 뵌다. 그 모습이 하도 정겨워 봄노래 한 소절 읊조려 보는 봄날 오후.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의 한복판이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삐 살아온 날들이었다. 여물대로 여문 봄빛은 산, 들, 바다에 고루 퍼져서 이젠 어디를 가도 그 산뜻함과 화사함에 푹 취할 수 있다. 봄이 주는 에너지요 위안이다. 봄을 심하게 타는 이들일지라도 저 아름다운 꽃들 앞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좋은 봄날, 자연을 만나러 집을 떠난다. 집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달려 다다른 강변마을. 마을길을 따라 복사꽃이며 살구꽃이 새색시 마냥 곱다.
삐뚜름히 올라간 고목의 가지에 흰 살구꽃이 담상담상 매달려 있다. 지금쯤 내 고향집 뒤란에도 살구꽃이 피어 있을까. 소나무가 빙 둘러선 고향집의 봄은 내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봄이면 고향집은 꽃대궐로 변한다. 재작년 봄, 정말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았을 때, 집이 온통 살구꽃 향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린 고향집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살구나무와 함께 오랜 세월 서 있었던 석류나무와 감나무, 밤나무는 베어져 없고, 그 자리엔 잡초만 다보록했다. 새 주인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모두 베어버렸다고 했다. 용케 살아남은 살구나무는 옛 주인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올해도 그 살구나무는 꽃봉오리를 열었을 테지만 쉽게 갈 수 없으니 세월을 탓해야 할까?
이즈음 산과 들은 온통 꽃이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땅을 가득 덮은 꽃들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여봐란 듯이 봉오리를 연 복사꽃, 자두꽃, 배꽃, 산벚꽃, 조팝나무, 그리고 길가에 피어난 애기똥풀, 제비꽃, 할미꽃….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먹만한 꽃까지, 그 누구를 그리며 살짝 피어난 생명들인가.
그러나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언제 꽃이 피고 지는지 알지 못한다.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도 ‘먹고사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연예찬은 먹고사는 것과 다르다.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꽉 찬 마음을 조금만 비우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나왔다. 우리들 메마른 가슴을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자연밖에 없다. 이건 변할 수 없는 진리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렇다.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봄꽃들은 칙칙하던 땅에 환한 잔칫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봄꽃들의 초대에 달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인지…. 가는 봄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김청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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