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잘 알려진 오죽헌이다.
그래서 정작 더 가보지 않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한자를 풀어보면 ‘검은 대나무가 있는 정자’인데
원래는 까마귀처럼 검은 소나무가 많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라는 두 인물이 떠오른다.
귀에 익숙한 만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과연 그럴까?

오죽헌(강릉시 죽헌동, 보물 제165호) 향해가는 길목에 ‘오죽’이 많이 눈에 띈다. 계단을 따라 올라 오죽헌에 들어선다. 원래 1452년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의 고택에 딸린 조선 초기의 별당으로 문신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오죽헌 현판 옆에 몽룡실이 있고 약간 올라선 앞쪽에 이이 사당(문성사)이 자리잡고 있다. 문성사 옆으로 휘어진 노송이 멋스럽고 뒤켠으로 가면 오죽 숲이 있다.
특히 마당에 눈길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600년이나 되었다는 배롱나무.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배롱나무(강릉시의 시화)엔 긴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다. 또 율곡매(천연기념물 제484호)라고 불리는 오래된 매화나무도 있다.
이이가 태어났다는 몽룡실 툇마루에 서서 우아하고 단아, 인자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신사임당의 초상화를 바라본다. 조선시대의 여성의 표본이며 현세에도 그런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 사임당의 생애는 어떠했을까? 1504년, 아버지 명화,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주로 한양에서 생활한다.
본명은 신인선이었으나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단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궁금하다. 사임당은 19세 때 덕수 이원수와 결혼한다. 조선시대의 기본 틀을 깨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친정에 살게 된다. 아버지 3년 상을 마치고서야 시댁에 인사했고 그 뒤로도 봉평과 강릉에서 38세까지 터전 삼는다. 허난설헌과는 비교 되는 부분으로 시어머니와 남편의 고달픔은 겪지 않아도 된 것이다. 4남 3녀를 두었고 남편이 수운판관이 된 후 48세에 세상을 떠난다.
사임당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명하였다는 것을 짐작하는 사례들이 전한다. 어느 날, 남편 친구들이 집을 찾아와 술이 얼콰히 취하자 신사임당의 그림을 보여 달란다. 그녀는 일부러 놋그릇에 그림을 그려낸다. 너도나도 그려달라고 할 것을 미리 대비책이다.
다음은 그의 아들 율곡 이야기다.
율곡은 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율곡을 잉태한 일화는 유명하다. 판관대(봉평군 백옥포리)에서 합방을 하고 아들을 낳게 되는데, 꿈을 바탕으로 어릴 적 이름을 ‘현룡’으로 짓는다. 율곡은 매우 총명해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고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 낼 정도였다고. 11세때 이이(李珥)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아버지가 심한 병으로 의식을 잃었고, 이이는 손가락을 깨물어 아버지의 입에 피를 흘려 넣는다. 이때 아버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이로 이름을 바꾸면 큰 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래서 바꾸게 된 것이다. 13세(1548년)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단다.
아버지는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라 독립심이 없는 성격. 힘겨운 일은 못하는 한량. 그러다보니 지아비를 통해 큰 뜻을 펼치고자 하였던 신사임당에게는 마땅치 않은 남편이었던 것. 이이가 써낸 “선비행장”을 보면 “아버지가 어쩌다 실수를 하면 반드시 지적하고 옳은 도리를 간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필종부가 아니라 남편을 꾸짖고 타이른 아내였던 것.
이이는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 아버지가 측은하면서도 답답함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황을 만나게 된다. 22세,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고, 1558년(명종 13) 23살,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이황을 방문한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이 장원하고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던 이황 역시 은둔의 길을 택하고 만다. 퇴계 선행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이는 2년 6개월 동안 은둔하기도 한다.
그러다 선조 때 이이는 정계에 가담한다. 16세의 선조와 32세의 이이. 선조는 성품이 착하고 영리했지만 국가 일에 별 뜻이 없고 의지가 박약해 도무지 실천력이 없는 인물. 선조를 보면서 아버지의 못 마땅함을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레 어머니처럼 직언을 한다. 하지만 충언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리 없다. 선조와 자꾸 대립하고 이이는 조정을 떠나게 된다. 5년 동안 은거에 들어갔지만 선조는 다시 이이를 맞이한다.
45세, 1580년(선조13, 28세) 겨울에 대사간 직으로 조정에 나온다. 그리고 대사헌으로 특진. 병조판서에 이른다. 그는 사망 전까지 계속 사직을 요청했지만, 선조는 이이에 대한 신임과 애정만큼은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1584년(선조17, 32세),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은 본처 노씨에게서는 자손을 얻지 못하고 두 측실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매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주마간산으로 신사임당과 이이에 대한 이력을 알아보았다. 정말로 못 견딜 정도의 우여곡절이나 파란만장한 삶은 아닌 듯하다. 박물관 등이 있으며 매년 10월 25~26일에 율곡제가 열린다.

■여행정보
<문의>033-640-4457/www.ojukheon. or.kr/관람시간: 오전 8시~오후 6시(하절기), 8시~오후 5시30분/휴관일 : 1월1일, 설날, 추석(오죽헌 문성사는 연중개방)/관람료:3천원(성인), 1천원(어린이)/주차가능/찾아가는 방법:동해고속도로-강릉IC-강릉 방면으로 가다 강릉대학로 팻말따라 들어가면 된다. 버스는 터미널에서 202, 30, 303번 이용.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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