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흐르는 공기는 맛이 틀리다. 사방팔방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의 푸르름이 눈속에 가득 들어찬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은, 행복해서다. 그저 눈이 싱그러우니 가슴 밑바닥에 쌓인 스트레스 한 덩어리가 한숨처럼 섞여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을 비껴 나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책상에 들어앉아 엉덩이 짓무르도록 사무를 봐야 하는 현실 속 밥벌이가 늘 힘겹다. 쉽진 않지만 어디론가 떠나야 할 시기다.

한계삼거리에서 진부령, 미시령방면으로 난 국도로 들어서면서 탄성이 나온다. 길 옆으로 멋진 계곡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지는 않다. 바로 구만동 계곡이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이름이 이 드라이브길에서 무어 그리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도로변에서 커다란 입간판을 만난다.
12선녀탕을 알리는 표시판이다. 아직까지 그 골짜기는 가보질 않았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12선녀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요새는 여행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자꾸 뇌리에서 질문의 번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적극적으로 행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일본 사진가 ‘후지와라 산야’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 해 내게 빙점이 찾아왔다. 사람 만나는 것이 싫어지고...그래서 내 사진속에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것은 내가 쇠잔해진 것이다”라고 말이다.
어쩌면 필자에게도 그런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작가처럼 일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훌쩍 봇짐 하나 들고 떠날 수 있는 현실도 아니다. 그러면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방법이 여행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 머릿속을 백짓장처럼 비워 놓고 옛 추억을 더듬거리면서 백담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이라는 책을 출간(2005년) 한 이후이니 벌써 5년이 지난 시기다.
단풍철이 아닌 초록물로 일렁거리는 것 빼고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백담사까지 셔틀 운행이 되고 있다. 예전에는 백담사 밑 3km 지점에서 걸어서 올라가야 했으니 말이다. 셔틀에 올라 차창으로 펼쳐지는 백담계곡에 시선을 뗄 줄 모른다.
첫 번째 방문때의 기억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던 계곡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백담계곡은 설악북부의 최고의 웅장한 계곡이다. 초입부터 백담사까지 6.2km의 계곡 길. 셔틀 이외에는 차량 통행이 안되기에 산 속 오염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맑은 계곡은 구비구비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금 차창으로 펼쳐지는 그곳엔 처음 방문때 봤던 산천어들이 떼지어 몰려 다니고 있을 것이다. 계곡 속에 손만 넣으면 토실한 물고기를 금세 잡을 것 같았다. ‘저 물고기를 잡아서 구워 먹을까’하는 욕심이 스멀스멀 기어 오르던 그 시절. 잠시 입가에 미소를 배어 물면서 그 물고기를 연상해보고 있는 것이다.
버스는 백담사 경내 입구 주차장에 멈춘다. 힘겹게 걷지 않아도 되는 것에 회심의 미소를 띠어 보지만, 한편으로는 그 맑은 계곡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만족이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래저래 안되는 것 투성이다.
예전 같이 사람들이 많지 않다. 비수철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유명해서 올 사람들은 다 왔기 때문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람 북적거리지 않으니 나름 좋은 것. 다리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면서 우선 절집 찻집 농암장실을 찾는다. 그저 힘겨워서 차 한잔도 제대로 못마시고 지나쳤던 그곳. 잘 지어 놓은 기와집. 사방팔방 활짝 창문을 열어 놓았다.
나무 의자가 넓게도 펼쳐져 있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게다. 텅빈 의자도 많지만 웬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은 실내에 풍겨나는 사람 맛이다.
여느 절집 찻집처럼 다양한 물건들을 진열해 놓고 판매를 하고 있지만 창가, 탁자위에 야생화 화분을 올려 놓은 것이 인테리어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아주 멋지게 꾸며진 절집 찻집인게다. 감상은 그 정도다. 햇살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결국 또 무슨 차를 마실까를 생각할 뿐이다. 개량 한복을 입은 차지기 아주머니 둘은 주문 받는 차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딱히 특색있는 차는 없다는 말에, 그윽한 한약재를 넣은 쌍화탕 말고 새로운 차는 없을까 생각하다 화암사 난야다원에서 먹었던 ‘송화차’ 한잔을 시킨다. 모양 없는 유리컵에 색 노란 꽃가루와 꿀을 얹고 얼음을 띄운다. 그저 휘휘 저어 마시면 되는 차. 꽃가루 향이 진하지 않고 얼음이 들어가 시원하다. 열어 놓은 창문너머로 관광객들이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잠시 무념무상 그곳에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 전시해 놓은 야생화에 핀 꽃이 화들짝 웃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거했다는 곳과 대웅전, 만해 한용운 기념관을 주마간산으로 들러보면서 이상국 시인이 쓴 ‘오래된 사랑’이라는 싯귀를 떠올려 본다.

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 팥배나무꽃 피었습니다/길 가다가 돌부리를 걷어찬 듯 화안하게 피었습니다/여기까지 오는 데 몇백년이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 마당에서/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그 오래된 사랑을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

여행정보
■찾아가는 방법:예전과 달리 길이 많이 넓어졌다. 46번지방도로를 타고 인제, 원통을 지나 미시령방향으로 좌회전. 십이선녀탕계곡을 지나면 백담사 입구-매표소에서 셔틀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추천 별미집:백담사 초입에는 맛있기로 소문난 백담순두부(033-462-9395)집이 있다. 돌집으로 잘 지어 놓은 이곳은 동해 간수를 이용해 만든 손두부가 유명하다. 또 멀지 않은 용대리에는 황태구이집이 있다. 용바위식당(033-462-4079), 진부령(033-462-1877)식당이 괜찮다. 숙박은 민박집과 장급여관이 있고 만해 기념관도 이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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