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겨울 바람이 얼굴을 스쳐간다. 코트 깃을 올리며 물 빠진 서해 갯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끼룩대는 갈매떼의 먹이 잡이를 구경하다 잿빛 갯벌에 눈길을 고정시킨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갯벌은 몇 시간 지나면 붉은 빛으로 변할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 강화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낙조에는 서글픔이 배어 있다. 순간 볼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차가운 겨울 바람 탓만은 아니다. 한해를 또 의미없이 보내버린 회한에서 오는 감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너무나 지쳐서, 이제 재밖에 남지 않은, 부석거릴 정도로 건조해진 내 마음이 처절하게 아팠기 때문이리라.

해마다 맞이하는 12월이라는 계절은 마음을 침잠하게 한다. 산도 좋지만 바다의 낙조를 핑계삼아 하냥 센티멘탈 해져보는 것도 카타르시스가 된다. 항상 반복되는 일상이 새로울 것 없고 그렇다고 딱히 변신을 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 일반적이다. 작은 변화를 스스로 찾지 않으면 지루함은 쌓이고 쌓여서 자기를 황폐화시킬 수 있다. 준비없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멀리 떠날 수 없을 때,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여행지중 한군데가 강화도다. 강화도의 대표여행지는 석모도지만, 배타는 것조차 귀찮은 날이 있다. 이럴 때는 가볍게 내륙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이른 아침이 아니어도 좋다. 짧은 겨울 해를 감안해서 점심먹고 나서서 전등사-함허동천-정수사-분오리 돈대-동막해수욕장-장화리를 잇는 해안길 코스로 잡고 여행을 해보는 일이다. 이곳저곳 욕심부려 점만 찍고 돌아서는 여행보다는 한군데라도 의미를 부여해서 사색에 잠기면, 그 여행이 오랫동안 기억된다.
세 개의 큰 산봉우리가 솥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정족산 자락에 들어 앉아 있는 전등사(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032-937-0125)는 천년고찰이다. 각종 국보와 보물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곳이지만, 그것은 차치하고 대웅전에 처마를 받들고 있는 나녀상에만 관심이 간다. 대웅전을 지은 도편수와 주모이야기가 흐르는 유명한 나녀상이다. 잠시 생각해본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을 했을까? 사랑이 없었기에 주모는 도편수의 돈을 챙겨서 도망친 것일까? 도편수는 어떤 마음으로 저리도 긴 세월, 처마 위에서 벌을 받기를 바랬을까?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면 돈의 아까움이었을까? 애증으로 변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어떤 상황이든간에, 벌거벚은 채, 원숭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녀상은 서글프기만 하다. 흔적없는 사랑은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든, 시든, 영화든, 다큐든, 어떤 방법으로라도 사랑이야기는 남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가 간 날 전등사의 위세(?)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큰 대법회가 열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강화 특산물인 순무김치, 약쑥 등을 파는 난전까지 어수선한 그 사이를 비껴 찾아간 죽림다원(竹林茶園, 032-937-7791). 잘 지어놓은 한옥 건물 한 채, 조악한 학 나무조각으로 입구를 표시하고 마당에 두어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는 야외 공간. 문득 찻집 뒷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면서 어릴 적 겨울 시골집을 떠올려 본다. 해 질녘, 군불을 떼고 밥을 짓느라 동네 집집마다 연기를 피어내곤 했다. 그 오래된 향수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롱아롱 이슬처럼 추억이 되어 맺힌다.
찻집 문을 드르르 연다. 대부분 관리미숙으로 외지인들이 경영하게 마련인데, 이 찻집은 전등사에서 9년동안이나 직영하고 있다고 한다.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두 명이나 된다. 찻집 안의 인테리어도 사람 손맛이 느껴질 정도로 안정적이어서 멋진 전원카페 분위기를 자아낸다. 페치카에 장작불이 지펴지고, 매캐한 나무 냄새를 풍겨내는 곳. 나무 테이블에 앉아 찻집에서 가장 맛있다는 대추탕 한잔을 시켜 본다. 생활자기에 담겨 놓은 대추탕은 걸쭉하면서도 진하다. 여느 전통찻집에서 흔히 마실 수 있는 흔한 차지만, 집집마다 손맛이 다르니 차 맛도 다르게 마련. 달짝지근하면서 겨울 피로를 주기에는 충분한 대추탕. 그래서 ‘차’라는 말 대신 ‘탕’이라는 이름을 붙인 듯하다. 사람들과 말을 뒤섞을 것도 없다. 그저 보고 느끼면 되는 일.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작은 꽃 소품이나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다완 등 판매하는 소품들이 잘 어우러진 절집 찻집에 내가 앉아 있다. 그윽한 차 한잔으로 상념 많은 여행객의 시름을 녹이고 있는 것이다. 종교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속가인이 느끼는 번뇌가 없을까? 단아한 여주인(?)의 얼굴을 보면서 잠시 비교를 해보는 정도다.
찻집을 나와 해안길을 따라 가다 함허동천-정수사를 거쳐 동막해수욕장 동쪽 끝에 있는 분오리 돈대(인천유형문화재 제36호,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도 가보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바닷가를 배회해본다. 여차리의 갯벌체험장도 지척이다. 해질녘에 바닷가에 서 있는 이유는 낙조를 보고 싶음이다. 강화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장화리 낙조. ‘그래 기분은 나아진거니’를 반문하는 그곳으로 처얼썩 파도 소리와 함께 해가 진다. 찾는 이 없고, 딱히 포인트 없는 그곳에 서 있는 그날 주체할 수 없이 서글퍼진 것은 순전히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한 회한이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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