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임브라(Coimbra)를 알려준 일본여성은 ‘like venezia’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날 벨렝지구에서 트램을 기다리다 만난 중년 남성도 코임브라에 대한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코임브라 인근에 ‘like tibet’처럼 멋진 곳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멋진 곳인지 궁금증에 견딜 수 없는데, 이미 예약된 비행기날짜는 단 하루뿐이다.

포르투갈에서 6일일정. 제법 여유있게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곳이 많다. 리스본에도 공항이 있었는데 필자가 굳이 포르토를 가야 할 이유는 처음으로 인터넷으로, 소위 말하는 경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지도상에 코임브라는 포르토 가는 중간지점이었으니 아침 일찍 서두른다면 포르토에는 오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된 것이다. 구석구석 속속히는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아름답다는 코임브라 땅까지는 발을 내딛어야 할 것 같다.
무거운 등짐을 다시 짊어지고 이제 능숙하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표를 산다. 두시간 채 안되는 거리. Tomar라는 곳에서 한번 멈추는 것도 모르고 차안에서는 잠을 잤고 이내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능숙하게 역에서 지도 한 장 받아들었고 능숙하게 시내로 진입하는 버스 편정보까지 얻어 냈다.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걷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시내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열차역을 지나자마자 사람들은 내리라고 손짓을 해준다. 강변이 보인다. 하지만 포르토만큼 감동적인 강변은 아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강변이 있는 마을은 사실이다.
그리고 티벳처럼 고산을 연상시키는 것도 없다. 그저 평지에 들어선, 비슷한 건물, 사람들. 여느 곳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기대가 컸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내에 중심가 도로변에서 무수히 많은 샵이 이어진다. 샵들은 나름대로 멋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구입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현혹적이다.
인포멘션은 광장 근처에 있었고 그 앞에 강변이 있다. 그저 능숙하게 동그라미를 쳐주는 지도 한 장 받아들고 어느 나라냐고 묻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 끝을 냈다. 지도에 표기된 데로 코임브라 박물관에 대해 간단하게 물었을 때 지금은 폐쇄중이라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쨌든 시간이 길지 않아서 욕심내는 여행은 할 수 없다. 그저 코임브라 어떤 곳인지 보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코임브라는 몬데구강(江) 하구에서 약 50km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학술, 예술의 중심지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코임브라대학이 있다.
그래서 이곳이 대학의 도시라고 했던 것 같다. 이 대학은 1290년 리스본에서 창건되어 1537년 코임브라로 옮겼고 특히 시인 루이시 드 카몽이스 등을 배출하였다. 그는 애국적 서사시 ‘오스 루시아다스’(1572)로 이름을 떨친 시성. 소네트에서 불후의 명시를 남겼다. 카몽이스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포르투갈 르네상스 문학을 완성하는 데 공로를 남겼다. 그는 33세 때 식민지 `동양의 모나코’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 곳 석동굴에서 기거하며 명저 ‘포르투갈 정신’을 탈고하고 숨졌다고 한다.
하여튼 코임브라에서는 이곳저곳보다는 대학을 방문하는 것이 중점이었기에 대학부터 찾기로 한다. 대학교를 찾아가는 길목은 길게 계단이 있고 아치형태의 돌담이 있으며 제법 구릉져 있어 언덕을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갯길을 따라 가다보니 성당을 만난다. 사실 엇비슷한 성당을 너무 많이 보았고 또한 본다고 해도 이해도가 없어서 그냥 입구만 스쳐 지나가기로 한다. 어림짐작으로 이곳이 구(舊)대성당인 듯하다. 계단길을 숨가쁘게 오르면 광장이 나온다. 광장을 오르기 전에 눈길을 잡아 끄는 카페가 있는데 느낌상으로 호스탈, 병원이었던 것 같다. 매우 오래된 건축물인데 그곳을 카페로 이용하고 있는 것. 아쉽지만 시간상 그냥 지나치고 만다.
대학가의 넓은 광장. 건물은 매우 많았다. 여러 군데를 구석구석 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을 향한다. 대학의 도서관은 주앙 5세 때인 1716~1723년에 건축되었다. 호화로운 금박장식의 서가와 안토니우 리베이로가 그린 천장 프레스코화가 특이하다.
또한 예배당 내부의 타일 장식벽화와 천장 그림 역시 걸작이다. 18세기의 파이프 오르간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곳 또한 아는 게 없다. 그래도 코임브라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골목과 샵이다.
대부분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집들이 이어지는데, 일부러 같은 길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골목마다 특징이 있는데 낙서는 으레 보는 일이다. 이곳 한 골목에서는 박물관이라는 손 글씨가 써 있었는데 해골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벽면에는 피카소 그림도 눈에 띈다. 장님이 된 고양이가 돌벽위에 앉아 있기도 한다. 비록 역사는 모르지만, 골목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또 하나 코임브라에는 눈물의 저택(Quinta das Lagrimas)이 있다. 페드로 왕자는 아버지 알폰소 4세의 강요로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왕자는 공주를 따라온 시녀 이네스 데 카스트로와 사랑에 빠져 세 아이까지 낳았다. 왕과 신하들은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의 압력이 두려워 이네스를 죽였는데, 후에 왕위에 오른 페드로는 코임브라에 묻힌 이네스의 유체를 알코바사의 산타마리아 수도원으로 옮기고, 자신도 죽은 후에 이네스 옆에 나란히 눕겠다고 했다. 페드로왕의 유언대로 두 연인의 관은 나란히 안치돼 있다. 지금 이곳은 별 다섯 개의 호텔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네스의 마르지 않는 눈물은 샘이 되어 솟아나고 있다고 한다. 이 샘을 “눈물의 샘(Fonte das Lagrimas)”으로 불린다. 샘이 솟아나는 곳의 바닥에는 핏빛이 연상되는 검붉은 바닥돌이 있는데 이네스가 살해될 때 이네스의 피로 물든 것이라고 한다. 샘 옆에는 시인 카몽이스의 “우즈 루지아디스”의 한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고 한다.
몽데고의 요정들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그녀의 슬픈 죽음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영원속의 기억을 찾아서 흘러내리는 눈물은/아름다운 샘이 되었다./저 처형의 장소에 생긴 샘을,/요정들은 이네스의 사랑이라 이름하였다./샘은 지금도 통곡을 계속하고 있다.
보아요, 이렇게 맑은 샘이 꽃들에게 물을 주는 것을.../사랑이라는 이름의 샘에서 흐르는 눈물의 물을...
페드로왕자는 왕위에 오른 후 교회에서 이네스야말로 조강지처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이네스의 처형에 가담한 모든 자들을 색출하여 죽여버렸다고 한다. 예나지금이나, 그리고 나라를 불문하고 이런 일들은 생기는 가보다.
그 외에 옛날 해외 영토를 포함하여 포르투갈 각지의 대표적 건물들을 모형으로 재현시켜 놓은 미니 포르투갈이 있고 또 하나 이곳은 포르투갈의 전통음악 ‘파두’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곳의 파두는 리스본의 파두와 달리 오직 남자들만이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코임브라는 그저 반나절로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 급하게 여행을 하면 결국 놓치고 마는 것이 너무 많은 것. 언젠가 또 기회가 된다면 코임브라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것 같다. 구성진 파두 선율을 따라 이네스 왕비의 슬픔을 넣은 포도주 한잔에 취하고 싶은 곳이다.

<끝>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