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리스본 시내에 울려퍼지는 ‘파두’ 선율에 매료되고
하 지만 한국인이 전혀 안사는 것이 아니다. 큰 중심지에는 으레 한국인이 있게 마련인데, 운 좋게 선교사를 소개 받을 수 있었던 것. 리스본에 도착하기 전 미리 연락을 해 두었는데, 아쉽게도 그날은 한인 야유회가 있어서 단 한사람의 재포르투갈인은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달랑 지도 한 장 챙겨들고 지하철을 타고 우선 벨렝지구(Belem)를 향한다. 시내 전철은 4라인만 있어서 노선도 한 장만 있으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닐 수 있게 편리하게 되어 있다. 7콜린스라는 티켓을 끊어 매일 충전시켜가면서 쓰면 되는데 버스, 트램 이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에도 교통문제는 있었다. 지하철, 시내버스는 그렇다치고 교외로 나가는 철도는 매우 복잡해서 나중에 길을 헤매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리스보아(Lisboa)라고 써 있었는데, 그 단어는 포르투갈어다. 리스본은 포르투갈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 굴지의 좋은 항구다. 도심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성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 향해 올라가면 포르토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테주강(스페인어 타호강)이 도심 주변을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일찍이 페니키, 그리스, 카르타고 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 해일로 시가지의 3분의 2가 파괴되어 현재는 역사적인 건물이 많지 않다.
시내권은 크게 동부의 알파마(Alfama), 중앙부의 바이샤(Baixa), 바이루 알뚜 지구(Bairro Alto), 신시가지로 나누어서 여행을 하고 조금 떨어진 벨렝지구까지 돌아보면 되는데 딱히 구획을 정해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우선 찾은 곳은 벨렝지구. 지하철을 타고 까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역에 내려 트램(tram 15번)을 타고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을 찾아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트램은 티켓을 구입해야 하는데 동전만이 가능하다. 한눈에도 알 수 있는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에서 내렸는데 이곳은 바스코 다 가마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약간의 회색빛이 느껴지는 거대한 건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곳은 외국의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만든 곳이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중 하나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카오다. 교회로 들어서는 입구에 바스코 다 가마와 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가 돌로 만든 관속에 누워 있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아는 내용은 없어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그의 이름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날 이곳에서는 단체로 온 한국인 여행객들을 만나고 그들을 안내하면서 설명해주는 한국말도 들었다. 그리고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하객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마치 외국영화에서 본 듯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인과 정장차림의 남자들이었다는 점이다. 한눈에도 품격이 달라보이는데, 이 나라도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배우나 모델급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멋진 사람들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벨렝지구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도로를 건너고 지하도를 건너서 테주강변에 있는 발견의 탑으로 간다. 이곳은 1497년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를 발견한 항해를 출발한 곳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곳에서도 또 한쌍의 결혼식 사진을 찍는 사람을 만난다. 먼저 보았던 것하고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기에게 드레스를 입힌 것을 보면 애를 낳고서도 결혼식을 하고 싶은 것은 우리네랑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날은 이곳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배들의 통관을 담당했다는 벨렝 탑(Torre de Belem)은 가질 못했다. 나중에 이곳을 찾아가는데 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겨우 사진 한컷 찍을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어쨌든 시내로 발길을 돌려 트램 정류장으로 갔고 그 앞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마카오에서 못먹었던 ‘에그타르트’를 이곳에서는 먹고 싶었는데 결국 포르투갈에 와서도 그 인연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지하철을 앞에 두고 무작정 시내로 걷는다.
바이루 알뚜지구가 멀지 않고 그곳에 가면 ‘파두’를 들을 수 있다는 책자의 이야기를 따라서. 하지만 책에 씌여진 대로 된다면 얼마나 편하겠느냐마는 엉뚱한 곳을 만나게 된다. 북적거리는 시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은 바이샤 지구. 광장 앞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Mask라는 쉬운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끼리끼리 모여서 각자의 특징을 살려 분장을 하기도 하고 탈을 쓰기도 하고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축제가 펼쳐지는 토요일의 리스본은 흥에 넘쳐난다.
그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큰 대로변을 따라, 인파의 물결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도로변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부르는 사람은 이제 생경하지 않을 정도인데, 이곳의 노천에서는 인디안 복장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나무로 만든 악기와 북을 치면서 연주하는데 그 선율은 가슴을 울려주기에 충분하다. 발견의 탑에서도, 바이샤 지구에서도 만난 거리 파두(fado)팀의 선율에 반해 1유로를 아깝지 않게 넣어주게 된다. 거리의 파두팀인지 지금도 정확치 않은데 파두는 ‘숙명’이라는 뜻을 지닌 포르투갈의 민요., 이곳에는 파두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알뚜 지역을 찾아 헤맸지만 그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한번 듣고 싶은, 정말로 심금을 울리는 연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번화가를 한없이 올라가면 로시오 거리를 만난다. 그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상 조르제 성이 보인다. 이 성은 나중에 시내를 다시 돌아보면서 찾아갔지만 성에서 내려다보는 리스본 시내도 좋았고 여러 가지가 매력적인 곳이다. 붉은 기와지붕의 건물들, 광장 등. 내가 훑고 지나온 거리를 가늠할 수 있어서 좋고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도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성의 기원은 고대 로마 지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세기 경에는 서고트족이 성채를 구축했고, 9세기에는 이슬람 교도인 무어인들이 성을 축성했다. 국토회복에 성공한 역대 포르투갈 왕들도 알파마 지구를 비롯하여 항구와 테주강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이 성의 군사적 이점을 살려 계속해서 요새로 이용하였다. 성곽 내부는 옛날 궁전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지금은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성문 안쪽 전망대 광장에는 이 성을 함락시킨 포르투갈 초대왕 알폰소 엔리케의 동상이 있고, 성문 북쪽에는 성 함락에 공이 컸던 마르팀 모니스 장군의 동상이 있다.
거기에 이곳은 대지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라서 주변이 중세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벽 밑으로 내려오는 반질반질한 검은 돌도 눈길을 잡아 끌고 엽서를 파는 상점, 빵가게와 바 등을 지나친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빵집에서 아주 맛있는 빵을 발견하고 내내 그것만 사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시간 남아서 첫날 못찾은 바이루 알뚜 지구를 찾아 헤맸고, 책자에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른, 골목에 낙서로 얼룩진 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여느 곳에서 보던 그늘진 골목이라는 것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자기 색깔을 가진 골목이라는 것이 제법 매혹적이다.
햇살 잘 드는 자그마한 카페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어서 자리를 틀고 앉았다. 다들 미남, 미녀들이고 젊은 주인장조차 분위기가 느껴진다. 먹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아도 될 토마토 소스 넣은 스파게티와 과일 칵테일 한잔을 시킨다. 대화를 자유자재로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 얼마나 좋을까. 아니 몇 마디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여튼 리스본 시내 여행은 이것으로 끝을 내야 할 것 같다. 물론 바이루-알뚜지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엘레바도르 싼다 주스타)를 타고 올라서서 시내를 다시 조망하기도 했고 바이샤 지구의 식당가에 앉아 닭요리를 시켜 먹은 적도 있다. 영어를 제법 하고 한국처럼 손님을 길목에 서서 유인하는 곳이다. 야외에 앉아 그릴에 구운 닭요리를 시켰는데 빵도 나오고 마가린, 딸기잼, 치즈 등을 차려주어서 생각없이 먹었는데 스페인의 대부분 식당과는 달리 따로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거지들이 많았다. 지나다니면서 관광객들에게 돈을 구걸하기도 하는 이미지 구겨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바이샤 지구라는 것도 염두에 두자.
그리고 그날 핸드폰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정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잠시 몇분 통화하고 20유로라는 거금을 주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은 스페인보다 국제전화비가 매우 비쌌고 특히 핸드폰으로의 통화는 1유로 동전을 쑥쑥 삼켜낸다는 점도 기억해두길 바란다.
(계속)
하 지만 한국인이 전혀 안사는 것이 아니다. 큰 중심지에는 으레 한국인이 있게 마련인데, 운 좋게 선교사를 소개 받을 수 있었던 것. 리스본에 도착하기 전 미리 연락을 해 두었는데, 아쉽게도 그날은 한인 야유회가 있어서 단 한사람의 재포르투갈인은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달랑 지도 한 장 챙겨들고 지하철을 타고 우선 벨렝지구(Belem)를 향한다. 시내 전철은 4라인만 있어서 노선도 한 장만 있으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닐 수 있게 편리하게 되어 있다. 7콜린스라는 티켓을 끊어 매일 충전시켜가면서 쓰면 되는데 버스, 트램 이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에도 교통문제는 있었다. 지하철, 시내버스는 그렇다치고 교외로 나가는 철도는 매우 복잡해서 나중에 길을 헤매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리스보아(Lisboa)라고 써 있었는데, 그 단어는 포르투갈어다. 리스본은 포르투갈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 굴지의 좋은 항구다. 도심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성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 향해 올라가면 포르토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테주강(스페인어 타호강)이 도심 주변을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일찍이 페니키, 그리스, 카르타고 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 해일로 시가지의 3분의 2가 파괴되어 현재는 역사적인 건물이 많지 않다.
시내권은 크게 동부의 알파마(Alfama), 중앙부의 바이샤(Baixa), 바이루 알뚜 지구(Bairro Alto), 신시가지로 나누어서 여행을 하고 조금 떨어진 벨렝지구까지 돌아보면 되는데 딱히 구획을 정해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우선 찾은 곳은 벨렝지구. 지하철을 타고 까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역에 내려 트램(tram 15번)을 타고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을 찾아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트램은 티켓을 구입해야 하는데 동전만이 가능하다. 한눈에도 알 수 있는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에서 내렸는데 이곳은 바스코 다 가마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약간의 회색빛이 느껴지는 거대한 건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곳은 외국의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만든 곳이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중 하나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카오다. 교회로 들어서는 입구에 바스코 다 가마와 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가 돌로 만든 관속에 누워 있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아는 내용은 없어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그의 이름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날 이곳에서는 단체로 온 한국인 여행객들을 만나고 그들을 안내하면서 설명해주는 한국말도 들었다. 그리고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하객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마치 외국영화에서 본 듯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인과 정장차림의 남자들이었다는 점이다. 한눈에도 품격이 달라보이는데, 이 나라도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배우나 모델급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멋진 사람들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벨렝지구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도로를 건너고 지하도를 건너서 테주강변에 있는 발견의 탑으로 간다. 이곳은 1497년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를 발견한 항해를 출발한 곳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곳에서도 또 한쌍의 결혼식 사진을 찍는 사람을 만난다. 먼저 보았던 것하고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기에게 드레스를 입힌 것을 보면 애를 낳고서도 결혼식을 하고 싶은 것은 우리네랑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날은 이곳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배들의 통관을 담당했다는 벨렝 탑(Torre de Belem)은 가질 못했다. 나중에 이곳을 찾아가는데 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겨우 사진 한컷 찍을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어쨌든 시내로 발길을 돌려 트램 정류장으로 갔고 그 앞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마카오에서 못먹었던 ‘에그타르트’를 이곳에서는 먹고 싶었는데 결국 포르투갈에 와서도 그 인연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지하철을 앞에 두고 무작정 시내로 걷는다.
바이루 알뚜지구가 멀지 않고 그곳에 가면 ‘파두’를 들을 수 있다는 책자의 이야기를 따라서. 하지만 책에 씌여진 대로 된다면 얼마나 편하겠느냐마는 엉뚱한 곳을 만나게 된다. 북적거리는 시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은 바이샤 지구. 광장 앞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Mask라는 쉬운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끼리끼리 모여서 각자의 특징을 살려 분장을 하기도 하고 탈을 쓰기도 하고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축제가 펼쳐지는 토요일의 리스본은 흥에 넘쳐난다.
그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큰 대로변을 따라, 인파의 물결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도로변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부르는 사람은 이제 생경하지 않을 정도인데, 이곳의 노천에서는 인디안 복장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나무로 만든 악기와 북을 치면서 연주하는데 그 선율은 가슴을 울려주기에 충분하다. 발견의 탑에서도, 바이샤 지구에서도 만난 거리 파두(fado)팀의 선율에 반해 1유로를 아깝지 않게 넣어주게 된다. 거리의 파두팀인지 지금도 정확치 않은데 파두는 ‘숙명’이라는 뜻을 지닌 포르투갈의 민요., 이곳에는 파두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알뚜 지역을 찾아 헤맸지만 그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한번 듣고 싶은, 정말로 심금을 울리는 연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번화가를 한없이 올라가면 로시오 거리를 만난다. 그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상 조르제 성이 보인다. 이 성은 나중에 시내를 다시 돌아보면서 찾아갔지만 성에서 내려다보는 리스본 시내도 좋았고 여러 가지가 매력적인 곳이다. 붉은 기와지붕의 건물들, 광장 등. 내가 훑고 지나온 거리를 가늠할 수 있어서 좋고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도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성의 기원은 고대 로마 지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세기 경에는 서고트족이 성채를 구축했고, 9세기에는 이슬람 교도인 무어인들이 성을 축성했다. 국토회복에 성공한 역대 포르투갈 왕들도 알파마 지구를 비롯하여 항구와 테주강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이 성의 군사적 이점을 살려 계속해서 요새로 이용하였다. 성곽 내부는 옛날 궁전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지금은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성문 안쪽 전망대 광장에는 이 성을 함락시킨 포르투갈 초대왕 알폰소 엔리케의 동상이 있고, 성문 북쪽에는 성 함락에 공이 컸던 마르팀 모니스 장군의 동상이 있다.
거기에 이곳은 대지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라서 주변이 중세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벽 밑으로 내려오는 반질반질한 검은 돌도 눈길을 잡아 끌고 엽서를 파는 상점, 빵가게와 바 등을 지나친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빵집에서 아주 맛있는 빵을 발견하고 내내 그것만 사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시간 남아서 첫날 못찾은 바이루 알뚜 지구를 찾아 헤맸고, 책자에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른, 골목에 낙서로 얼룩진 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여느 곳에서 보던 그늘진 골목이라는 것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자기 색깔을 가진 골목이라는 것이 제법 매혹적이다.
햇살 잘 드는 자그마한 카페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어서 자리를 틀고 앉았다. 다들 미남, 미녀들이고 젊은 주인장조차 분위기가 느껴진다. 먹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아도 될 토마토 소스 넣은 스파게티와 과일 칵테일 한잔을 시킨다. 대화를 자유자재로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 얼마나 좋을까. 아니 몇 마디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여튼 리스본 시내 여행은 이것으로 끝을 내야 할 것 같다. 물론 바이루-알뚜지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엘레바도르 싼다 주스타)를 타고 올라서서 시내를 다시 조망하기도 했고 바이샤 지구의 식당가에 앉아 닭요리를 시켜 먹은 적도 있다. 영어를 제법 하고 한국처럼 손님을 길목에 서서 유인하는 곳이다. 야외에 앉아 그릴에 구운 닭요리를 시켰는데 빵도 나오고 마가린, 딸기잼, 치즈 등을 차려주어서 생각없이 먹었는데 스페인의 대부분 식당과는 달리 따로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거지들이 많았다. 지나다니면서 관광객들에게 돈을 구걸하기도 하는 이미지 구겨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바이샤 지구라는 것도 염두에 두자.
그리고 그날 핸드폰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정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잠시 몇분 통화하고 20유로라는 거금을 주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은 스페인보다 국제전화비가 매우 비쌌고 특히 핸드폰으로의 통화는 1유로 동전을 쑥쑥 삼켜낸다는 점도 기억해두길 바란다.
(계속)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