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통화시에 도착해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집안’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전날 불평불만을 늘어 놓던 사람도 피곤에 겨워 단잠을 잤는지, 기분은 원상태로 돌아온 듯하다. 이제부터는 산길을 걷는 일 없이, 그저 순탄한 관광코스다. 긴장감도 풀리고, 마음도 여유자적해진다. 며칠사이 익숙해진 중국의 모습이 그다지 색다르지도 않다.

‘집안’은 고구려의 역사 현장

‘집안’으로 가는 길목은 우리 눈에도 많이 익숙하다. 강원도의 한 시골을 달리는 듯한 기분이다. 눈발이 날리고 산정에는 설화가 핀 곳도 있다. 차안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집안은 ‘장뇌삼’의 산지라는 것. 썰렁한 자연풍치를 보면서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눈발이 그치고 파릇파릇 새순이 난다. 같은 지역이지만 일기는 큰 차이를 보이는 듯하다.
우선 집안에 도착해 광개토왕비석(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강현(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을 찾는다. 길림성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만포마을과 지척인 마을이다. 강 너머로 펼쳐지는 북한 산은 나무가 없는 썰렁한 야산이었는데, 모두 벌목해 중국에 팔아버려서 그렇단다. 그리고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있고 간간히 사람들도 눈에 띈다. 회색빛 시멘트 공장 탓인지, 강변 너머 북한땅은 매우 초췌해 보인다.
어쨌든 이 지역은 온통 고구려 역사의 현장이다. 앞서 소개는 하지 않았지만 오는 길목에서 오녀산성(일명 졸본성)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그저 눈도장만 찍고 온 곳이 있다. 일단 졸본성은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이 처음으로 고려의 도읍지로 만들어 쌓은 성이라고 전해온다.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이 있다. 각 유적지마다 ‘UN’ 팻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알려면 동북공정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지난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에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시도하자 중국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게 되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집요하게 북한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지연시키는 방해공작을 펼치게 된다. 그 사이 중국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단행하고 북한과 함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동시 지정을 받게 된 것. 중국은 고구려 역사 편입을 위한 동북공정에 무려 1조원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우선 졸본성에 대한 자료는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에 “2~3세기경 고주몽은 비류수가에 나라를 세우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이곳에 세웠다”고 표기되어 있다.
졸본성이 자리잡고 있는 ‘환인’이라는 지명도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고 물태극을 만들며 흐르는 혼강(비류수) 유역에 눈길을 사로잡는 산에 성을 쌓았다. 아쉽지만 졸본성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잠시 주차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휘뿌연 안개에 뒤덮힌 산정을 바라보는 것과 도로표시석에 점을 찍는 것으로 끝을 냈다.
이야기는 다시 집안쪽의 고구려 문화유적지로 옮겨야 할 듯하다. ‘집안’은 고구려가 지금의 환인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왔다가 평양으로 천도를 한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다.
현재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는 인구 22만의 소도시. 서기 3년 추모왕(주몽)의 아들이자 2대왕인 유리왕이 천도해 서기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린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광개토대왕비와 고구려인의 생활모습

광개토대왕비를 비롯 장군총 무용총 등 고분 1만2천여기, 국내성터 환도산성 등 고구려 유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집안 전체에 고구려 문화유적이 흩어져 있다고 해야 한다.
우선 집안의 광개토대왕비(광개토왕의 시호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는 넓은 터에 비가림을 할 수 있는 비각을 설치하고 거대한 돌 한기를 보호하고 있다.
이 광개토왕비는 414년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가 6.39m로 사람 키보다 세 배정도로 거대하다. 각 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버려진 비석은 1883년 일본 첩보 장교 사까와 중위가 비문의 내용을 일본에 소개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발견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지금에 이른 것.
어쨌든 자리를 옮겨 장수왕릉을 찾는다. 여러 왕릉 중에서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장수왕릉 뿐.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해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고 한다. 돌무지돌방무덤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후궁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장군총의 딸린무덤(배총)이다. 원래는 4기가 있었다는데, 한기만 남아 있다. 첩의 무덤까지 세워졌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장수왕릉의 동쪽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우산하고분군에는 귀족묘지가 있다. 이미 많은 고분은 도굴이 되어 버렸고, 발굴된 문화재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 무덤.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중국 당국이 벽화 보호를 위해 무덤 내부 공개를 막고 있는데 일부는 관람이 가능하다. 사신묘, 말구유무덤, 각저총(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등 벽화를 갖고 있는 무덤이 많다.
이 벽화들은 고구려인의 생활, 문화, 철학 등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어 그 가치가 높다. 5호 무덤과 더불어 4호 무덤에서는 사신도 등 다양한 신을 형상화한 벽화와 천문도 등이 발견돼 고구려인들의 철학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사신묘’에서도 같은 그림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비록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낯익은 천마도는 보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색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신묘 벽화에 대해서는 감격 그 자체다. 돌아나오는 길에 가이드가 가리키는 돌 표지석. 청일 전쟁때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세운 돌비석이란다. 역사는 흘러가지만 그 흔적을 남겨 세월을 읽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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