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 대미 투자시 제조中企 ‘산업 공동화 도미노’ 경고등

[진단] 한미 상호관세 협상 후폭풍 대기업 생산라인 이전·투자 가속 중소제조업 주요 수요처 사라져 조달·기술·인력 기반 동시에 흔들 핵심 생산역량 ‘산업 공유지’ 약화 中企, 자체 매출원 확보전략 필수

2025-11-21     이권진 기자

[중소기업뉴스 이권진 기자] 국내 제조업 생태계가 한미 상호관세 협상 마무리 이후 새로운 구조적 충격에 직면하고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은 지난 17일 발표한 ‘상호관세 이후 글로벌 통상질서의 변화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협상 과정에서 약속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가 국내 생산 기반을 약화시키며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군에 ‘산업 공동화’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대기업의 미국 내 생산라인 확장이 단순한 해외투자가 아니라 국내 소부장 공급망 전반의 구조적 공백을 일으킬 가능성에 주목했다. 

특히 상호관세 인하의 조건으로 요구된 반도체·배터리 분야 등의 미국 현지 투자가 대기업 조달 구조를 급속히 흔들면서 국내 관련 부품 중소기업계의 생태계와 일감 구조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핵심 위험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하준경 경제성장수석, 정기선 HD현대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 오현주 국가안보실 3차장. 연합뉴스

전문가들 한 목소리 제조업 무너질 수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의 미국 중심 재배치는 중소기업에 가장 먼저 충격이 전해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대기업의 생산라인이 이동하면 이를 떠받치는 중소 부품업체는 주력 수요처를 잃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 축적 △조달 네트워크 △숙련 인력 구조가 한꺼번에 붕괴하는 ‘산업 공동화 도미노’가 발생한다. 

앞서 한국산업연구원(KIET)도 올해 초 산업전망 보고서를 통해 “향후 4~5년 내 국내 제조업의 해외 이전이 본격화될 경우 산업 공동화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중소 제조업의 조달·기술·인력 기반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산업 공동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은행은 지난 9월 2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서면 자료에서 “대미투자로 단기적으로는 중간재·자본재 수출 등 성장 유발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산업 공동화·고용 위축·인재 유출 등의 리스크도 있다”고 답했다.

같은 달 16일 국회외교안보포럼에서도 경고음은 나왔다. 한국국제통상학회장인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중 해외직접투자가 급증하던 2000~2010년엔 해외투자기업의 국내 공장 폐쇄율과 설립률 격차가 없어 해외투자기업이 국내 투자와 고용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며 “반면 대미 투자가 급증한 2015~2024년에는 국내 공장 폐쇄율이 설립률보다 높아 국내 투자와 고용 감소에 영향을 줬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중소기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은 글로벌 전략으로 재편하더라도 여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일감이 끊기는 순간 바로 생존 위기로 연결된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지난 11일 ‘중소 제조업 전환 전략, 위기에서 혁신으로’ 정책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이 진병채 한국중소기업학회장(오른쪽에서 네번째)을 좌장으로 열띤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중소기업뉴스 DB

대·중기 ‘산업 공유지’ 지켜야 제조업 산다

문제는 이 같은 해외 이전 흐름이 국내 제조산업의 집단적 생산역량인 ‘산업 공유지(industrial commons)’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일 중소기업중앙회가 개최한 ‘중소 제조업 전환 전략: 위기에서 혁신으로’ 정책토론회에서 오윤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앞으로 10년 한국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은 대·중소기업이 함께 축적해 온 산업 공유지를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업 공유지를 공장·부품·소재 인프라, 숙련 인력, 연구개발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산업의 집단적 역량으로 규정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탄소정책·AI 전환이 모두 이 기반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변화라고 분석한 것이다.

오 연구위원은 주요국의 대응 사례를 제시하면서 생태계 기반 강화가 제조 경쟁력의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독일은 제조 데이터의 표준화와 산업 간 공유 플랫폼을 구축하는 ‘Manufacturing-X’와 ‘Catena-X’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생태계 기반 강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세액공제와 관세 정책으로 첨단 제조설비를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제조업의 4차 산업혁명 기술 활용률이 2023년 기준 19.6%에 그치며, 단일 공정 중심의 노후 라인이 첨단 전환을 가로막고 있어 산업 공유지의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오 연구위원은 “무리한 신설 설비 구축보다 기존 라인을 개조·고도화하는 레트로핏(retrofit) 전략이 중소기업의 현실적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레트로핏은 기존 설비나 공정을 완전히 새로 짓지 않고, 첨단 기술을 덧붙여 기능을 고도화하는 개조형 혁신 방식을 말한다.

아울러 그는 “기술·데이터·숙련이 집적된 산업 공유지가 무너지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혁신 속도를 잃는다”며 “국가 산업의 집단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곧 제조업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중소 제조업 현장에선 사업 지속 자체를 포기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 투자 환경 개편 속도 내야

하지만 전문가들은 산업 공유지가 산업 공동화의 중요한 대응 전략이지만 단독 해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장 큰 이유는 대기업의 미국 이전을 유인하는 관세·보조금·규제환경 등 미국의 ‘초과 인센티브 구조’를 산업 공유지만으로 상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계에선 “국내 생산거점의 비용 부담은 높아지고 중대재해처벌법 등 한국의 각종 노동 및 기업 규제 강도도 심화되는 반면에 해외 인센티브는 압도적 수준이어서 국내만 바라보고 있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는 산업 공유지가 국내 생산역량을 붙잡아두는 기반으로는 유효한 카드지만, 대기업의 투자 방향성 자체를 되돌릴 힘은 제한적이란 의미다.

또한 산업 공유지 구축 역시 대규모 예산과 부처 간 조정이 필요한 중장기 전략이어서 단기간 내 즉시 효과를 내는 대응책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도 한계도 공존한다. 공공 인프라 조성, 공동 설비 구축, 데이터 공유체계 마련 등은 수년 단위의 작업이기 때문에 산업 공동화 속도에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산업 공동화 위험의 해결방안으로 산업 공유지를 기반으로 하되 그 위에 두 가지 전략을 추가로 결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선 국내 투자환경을 구조적으로 재정비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대기업의 해외 이전을 자극하는 △전력단가 △탄소비용 △환경규제 △입지제한 등 국내 비용 요인이 누적되면서 국내 공장의 경쟁력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왔던 게 사실이다.

실제 기업 현장에선 “국내 제조단가를 좌우하는 요소가 미국·유럽 대비 높게 형성돼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좁다”고 지적한다. 세제·에너지·탄소 관련 비용구조를 재설계해 국내 투자유인이 높아져야 산업 공유지 전략이 작동할 공간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중소기업의 시장경쟁력 강화 정책도 병행돼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중소 제조기업은 생산역량은 갖추고 있지만, 판로·수출·브랜드·디지털 판매망 등 시장 접근성에서 취약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생산 기반만 유지된다고 해서 기업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의 해외 이전이 가속되면 중소기업은 조달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매출원을 확보하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산업 공동화의 경고등이 켜진 상황에서 정부와 국회 그리고 중소기업계가 제조업을 둘러싼 생산·시장·정책 환경을 종합적으로 재설계해야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