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바스락 ‘낙엽들의 아우성’⋯가을, 와인이 그리운 건 ‘어쩔수가 없다’
피노누아·네비올로 & 피노누아, 은은한 흙내음에 긴 여운 부르고뉴에서 자라난 것이 최상품 네비올로, 이탈리아 와인의 자존심 오래 숙성한 바롤로, 무한 풍미 과시 기분·음식따라 화이트와인도 매력 오크 숙성 거친 샤르도네가 대표적
가을은 와인의 계절이다. 선선한 바람 불어오고 이따금 낙엽 흩날릴 때 깊은 풍미의 와인은 그저 한잔 술이 아닌 계절을 담은 풍경처럼 다가온다. 여름의 청량한 맥주도, 겨울의 묵직한 위스키도 줄 수 없는 특별한 위로다. 그리고 그 중심엔 가장 먼저 거론되는 두 품종이 있다. 피노 누아와 네비올로다.
피노누아, 한번 빠지면 재산탕진 속설
섬세함의 대명사 ‘피노 누아(Pinot Noir)’는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품종 중 하나다. 새촘한 붉은 과실향에 은은하게 다가오는 흙내음, 여린 듯하면서도 이내 입안을 온통 루비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가을의 정취와 꽤나 닮았기 때문이다. 다른 레드 와인에 비해 바디가 가볍고 산뜻한 편인데 한 모금 뒤에 남는 여운은 길고 우아하다.
때문에 애호가들 사이에선 ‘돌고 돌아 결국 피노 누아’, ‘피노 누아에 한 번 빠지면 재산을 탕진한다’라는 재밌는 속설이 돌기도 한다.
원정에 나설 때도 항상 챙겨갈 정도로 와인을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거의 매일 같은 와인을 마셨는데, 바로 ‘주브레 샹베르탱’이라는 와인이다.
이 와인이 부르고뉴 주브레 지역의 피노 누아로 만든 포도주라는 사실까지 알고나면 피노 누아의 매력이 한층 더 크게 다가온다.
나폴레옹의 와인을 생산한 부르고뉴는 피노 누아의 대표 산지로 전 세계 서늘한 기후를 지닌 모든 곳에서 재배되지만, 부르고뉴에서 자란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약 2천년 전, 부르고뉴 지역에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름은 소나무(Pine Tree)와 검정(Noir)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포도알이 매우 작고 빽빽하게 자리잡은 피노 누아의 포도 송이 모양이 솔방울과 닮았기 때문이다.
완성된 와인은 체리, 라즈베리, 딸기 향 같은 붉은 베리류의 과실향을 기본으로 하며, 부드러운 탄닌과 산뜻한 산미가 조화를 이룬다. 젊은 와인에서는 라즈베리, 체리 등 신선한 과일향이 나고 숙성될수록 가죽, 버섯, 흙내음, 낙엽 등 복합적인 향과 함께 삼나무의 스파이시한 풍미도 발현된다.
여기에 지역별, 빈티지별 재배 환경과 양조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이니 평생 피노 누아 한 품종만 마셔도 결코 지루함이 없을 터.
부르고뉴 외에도 미국 오레곤과 카르네로스, 러시안 리버 밸리, 남아공의 워커 베이와 엘진, 뉴질랜드 마틴보로의 피노 누아가 유명하다.
벨벳 같은 탄닌 ‘온화한 느낌’
고혹적인 매력의 ‘네비올로(Nebbiolo)’도 가을에 제격이다. 피노 누아가 섬세함의 대명사라면 네비올로는 이탈리아 와인의 자존심이라 불리며 강인한 특성을 뽐낸다.
‘타르와 장미’라는 표현은 네비올로가 가진 독특한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오렌지 빛이 감도는 옅은 루비빛에 장미 같은 붉은 꽃 향기와 제비꽃의 은은한 향이 먼저 마중나오고 이내 타르, 정향, 야생 허브, 딸기와 체리 같은 붉은 베리, 자두, 감초 등의 아로마가 깊이 있게 다가온다.
입에서는 탄탄한 구조와 벨벳 같은 탄닌이 온화한 느낌을 선사한다. 몇 년 동안 숙성하면 담배잎, 송로버섯, 낙엽 쌓인 부엽토 같은 고혹적인 뉘앙스가 더해진다. 마치 가을의 농익은 공기처럼 복합적이고도 진중한 매력을 품은 와인이다.
네비올로라는 품종의 이름은 안개(Nebbia)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포도 수확기인 10월 말, 피에몬테의 언덕을 덮는 안개 속에서 익어가는 포도의 모습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는 네비올로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특히 네비올로로 만드는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가 대표적이다. 바롤로는 명실공히 최고의 네비올로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 명칭이다. ‘이탈리아 와인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바롤로는 네비올로의 장엄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오크 숙성 18개월 이상을 포함해 최소 38개월의 숙성 기간을 거쳐야하는 바롤로는 긴 숙성을 통해 탄닌은 부드러워지고 복합적인 부케와 깊은 맛을 드러낸다. 보통 빈티지로부터 10년 후에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래 숙성한 바롤로는 한 병을 두고도 끝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만한 무한한 풍미를 품게 된다.
상대적으로 우아하고 섬세한 매력을 지닌 바르바레스코는 ‘이탈리아 와인의 여왕’으로 불리며 바롤로와 짝을 이룬다. 바롤로보다 의무 숙성 기간도 짧다. 오크 숙성 9개월 이상을 포함해 최소 26개월 숙성하면 된다. 때문에 바롤로보단 조금 이른 시기에 마실 수 있다.
피에몬테 외에도 롬바르디아 최북단에 위치한 발텔리나 지역에서도 수준급의 네비올로를 만든다. 네비올로 단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아니지만 네비올로를 90% 이상 사용한다. 피에몬테 네비올로에 비해 탄닌과 산미, 바디감 등이 전반적으로 가벼운 편이지만 가성비가 더 좋은 편이다.
화이트와인, 파스타 등과 환상궁합
가을에 레드 와인이 더 끌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곁들이는 음식이나 기분에 따라 화이트 와인이 생각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청량하고 산뜻한 뉘앙스가 지배적인 것보다는 좀 더 깊고 따뜻한 결을 가진 화이트 와인이 이 계절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오크 숙성을 거친 샤르도네다.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숙성한 샤르도네가 신선한 과일향을 강조한다면 오크에서 숙성한 샤르도네는 바닐라, 구운 빵, 버터 같은 풍미를 뽐내며 가을의 기름진 식탁에도 잘 어울린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뫼르소,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샤르도네가 대표적이다. 가금류 요리나 크리미한 소스의 파스타, 버섯 리조또 등과 곁들이면 가을의 따사로운 햇볕 한 줌이 잔 안에서 빛난다.
프랑스 알자스 지역의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도 가을에 제격이다. 화사한 장미향, 리치의 농익은 뉘앙스에 꿀의 달큰한 맛이 무게를 더하고 와인에 따라 계피, 스모키한 향 등이 복잡성을 강화시키며 쌀쌀한 날씨에도 제법 입에 맞는다. 게뷔르츠트라미너가 지닌 약간의 당도와 풍부한 바디감은 매콤한 아시아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shinda.wri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