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신다솜] 일본 홋카이도 ‘히가시카와’ 여행 ❶
빼곡한 문화 콘텐츠 눈길... 이러니 살고 싶을 수밖에! ‘길위의 휴게소’ 도초관 필수방문 코스 이주민 운영 핫한 가게 구석구석 산재 30년 연속 인구증가로 소도시 롤모델
눈 내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만큼 적요한 1월 설국의 아침. 소복이 쌓인 눈길을 가로질러 어디든 안으로 들어가면 온화한 색과 질감의 자작나무 가구가 언 몸을 따뜻이 녹여준다. 상인들의 상냥한 말투에선 소박한 차림새에도 여유가 느껴진다. 그저 엿보는 것만으로도 좀 더 삶을 다정하게 대하고 싶어지는, 히가시카와의 모습이다.
히가시카와정(東川町)은 일본 홋카이도 한가운데 가미카와 내륙분지에 있는 작은 마을로, 2023년 1월 30일을 기준으로 인구 약 8500여 명, 외국인 500여 명이 거주하는 소도시 중 소도시다. 우리나라 기준으론 ‘읍(인구 2만 이상)’에도 못 미치는 아주 작은 규모다.
지리적으로는 일본 최대 국립공원인 다이세츠잔 국립공원(大雪山国立公園) 일부를 포함한다. 다이세츠잔의 주봉인 아사히다케(旭岳)까진 30km 남짓. 마음만 먹으면 홋카이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다이세츠잔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로프웨이(케이블카)와 온천까지 즐길 수 있다.
홋카이도에서 삿포로시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아사히카와시(旭川市)와도 인접해 있다. 아사히카와 공항에서는 차로 15분 정도 소요되며 현재 아시아나 항공에서 아사히카와까지의 직항을 주 4회 운항 중이다. 크리스마스 나무, 청의 호수 등으로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비에이·후라노 지역과도 가깝다.
유명 관광지들과 가깝지만 아직 국내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히가시카와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여행을 계획하고 비에이 투어를 찾아보던 중 발견한 곳이다. 지역명 조차 입에 잘 붙지 않을 만큼 낯설었지만 몇 없는 후기글들과 구글 지도에 표시된 매력적인 장소들에 이끌려 바로 숙소를 예약했다.
숙소 예약은 에어비앤비를 통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작은 마을엔 호텔 같은 전문 숙박 시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주민이 운영하는 민박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오베르주’(auberge)라고 하는 형태의 숙박 시설이 많다.
오베르주는 프랑스말로 숙박 시설을 갖춘 레스토랑을 뜻한다. 일본에선 공공연히 쓰는 표현인데, 치자면 우리의 옛 주막과도 같은 개념이랄까? 여행일이 임박해 숙소를 예약한 탓에 선택지가 적었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먹거리인 스프 카레 식당 2층에 사흘 간의 거처를 마련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공항인 신치토세 공항에서 히가시카와까지 꼬박 여섯 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삿포로역, 삿포로역에서 아사히카와역까지 JR 열차를 환승해 이동한 다음 아사히카와역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로 가는 루트를 택했다. 이미 신치토세 공항 도착 항공권을 예매한 이후에 히가시카와를 알게 됐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천공항에서 8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하루를 꼬박 다 쓴 긴 여정이었지만 1월의 홋카이도는 목적지로 가는 길마저 훌륭한 유람이 돼준다. 창밖으로 하얀 설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열차의 간이 테이블을 펼쳐놓고 먹은 편의점 주먹밥과 맥주 한 캔이 여행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으로 기억에 남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사히카와역에서 67번 버스를 탔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오후 4시 무렵 해가 지기 시작해 5시만 돼도 완연한 밤이다. 버스는 길 위의 휴게소라 불리는 도초관(道草館)에서 멈췄다.
히가시카와 도초관은 특산물과 기념품 등을 구매할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이라면 무조건 들러야 하는 코스 중 하나다. 시중 마트에서는 구입하지 못하는 품질 좋은 쌀들을 비롯해 히가시카와에서 생산한 와인, 사케와 같은 술과 마을 내 잼 카페, 공방 등에서 만드는 크래프트 제품까지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쇼핑센터다.
마을이 작아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숙소까지는 걸어서 3분 남짓 걸렸다. 대강 짐을 풀고 나온 저녁 7시 무렵 히가시카와 마을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숙소 밑 스프 카레집과 근처 슈퍼마켓에서 몇몇 사람들을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여러 곳 있었으나 이 마을 기준 시간이 늦은 데다 연초에는 문을 닫는 곳들도 많아 가까운 카페에서 함박스테이크와 야키소바를 포장해 숙소로 돌아왔다. 대도시의 맛집이 부럽지 않은 맛과 모양새였다. 그저 문 연 곳을 찾아갔을 뿐인데 대기도 없이 이 훌륭한 함박을 맛볼 수 있다니, 히가시카와의 매력에 깊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히가시카와에는 마을 규모에 비해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 베이커리, 공방 등이 자리한다. 물론 큰 도시에 비할 만큼 많다 할 순 없지만 도시에 있어도 인기를 끌 것 같은, 핫한 요소를 고루 갖춘 가게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중 많은 데가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곳들이다. 매해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며 근사한 가게가 생겨나고 있다. 알고 보면 히가시카와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타지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다. 인구소멸지역에서 인구 증가를 위해 지원하는 이주지원금 같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유일하게 30년 연속 인구가 늘어난 지역으로 손꼽힌다.
가구 이야기만 들어도 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히가시카와는 질 좋은 목자재 가구를 생산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공공 건물에서는 무조건 히가시카의 공방에서 만든 가구를 사용하도록 돼 있고, 가정집이나 가게 등에서도 히가시카와 가구를 사면 지원금을 주는 제도까지 있다고 한다. 여기에 ‘의자 프로젝트’까지 합세해 지역 내 가구 산업 발전의 밑거름을 제공하니 자연스럽게 젊은 가구 장인들이 하나둘 모일 수밖에 없다.
의자 프로젝트는 마을 내 갓 태어난 아이에게 ‘너의 의자’를,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배움의 의자’를 주는 히가시카와만의 프로젝트다. 지역 대학원 세미나에서 제안됐던 아이디어를 정(町)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해 운영 중이다.
문화시설은 또 어떤가.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이 작은 마을엔 일본에서 재정이 가장 풍부한 지자체인 도쿄 미나토구 수준의 문화시설이 자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영장을 지닌 스포츠센터부터 도서관, 갤러리, 사설 피아노 콘서트홀 등은 말할 것도 없다.
히가시카와초교는 천연 잔디 야구장과 축구장, 과수원까지 갖추고 있으며 부지 면적만 서울광장 열 배 크기인데 학생 수는 400명을 밑돈다. 이렇게 양질의 문화시설과 아이들을 환대하는 정책이 어우러져 많은 이주자들이 육아 세대로 이뤄진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자연스럽게 일본의 다른 지방 소도시보다 고령화율도 낮다.
이와 같은 히가시카와의 인구 증가 사례는 이른바 ‘히가시카와 스타일’로 불리며 국내 지방 소도시에도 롤모델이 되곤 한다. 당장에 이주민들을 끌어들일 표면적인 정책 지원이 아닌, 지역 내 문화 콘텐츠 강화를 통해 살기 좋은 마을로의 근간을 다지고 이주민이 천천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스타일로 말이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shinda.wri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