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역병, 일상’ 특별전]
천연두 유행하자 혼례식 미루고
전쟁때처럼 외딴지역으로 피란도
두창 돌자 과거시험 장소도 이전
평범한 일상 찾는 옛 풍속도 오롯

두창(痘瘡)을 앓는 아이가 어젯밤에 증세가 매우 심해져서 가래 끓는 소리가 밖까지 들렸으니 목숨을 구하지 못할까 염려되고 매우 걱정스럽다’ (중략) ‘유시(오후 5~7)에 이르러 두창을 앓던 아이가 결국 죽었으니 비참하고 슬픈 마음을 어찌하겠는가

조선 후기 무관인 노상추가 기록한 17781227일자 노상추일기의 한 부분이다. 마땅한 예방책이나 치료법이 없던 상황에서 천연두로 아이를 잃은 참담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역병, 일상’ 특별전은 과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을 뒤흔든 주요 역병과 이를 함께 이겨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역병, 일상’ 특별전은 과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을 뒤흔든 주요 역병과 이를 함께 이겨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전염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울타리 밖인가에서 전염병에 걸린 자가 있어 사흘간 앓았다. 그의 부인은 도망갔다고 하므로 염려스러웠다는 구절을 볼 수 있는데, 부인마저 남편을 버리고 도망갈 만큼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역병은 두려운 대상이었음이 잘 드러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단계적 일상회복이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역병, 일상특별전을 지난 24일 개최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조선시대 역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법 등이 기록된 묵재일기(默齋日記)’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등 전통사회를 휩쓴 역병과 그 속에서 일상을 지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선보인다.

 

굿판 벌여 천연두 물리치고

천연두 없애는 ‘마마배송굿’에 사용한 짚말
천연두 없애는 ‘마마배송굿’에 사용한 짚말

특히 조선 중기 역병의 모습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묵재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와 정조 때 무관인 노상추(1746~ 1829)67년 간 쓴 일기로 조선 후기 역병의 모습이 드러난 노상추일기 원본이 대중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두창으로 목숨을 잃는 일은 흔했다. 지금과 같은 백신도 없던 시절, 조선시대 사람들은 주술적 행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전에는 이를 증명하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이문건은 묵재일기를 통해 붉은 글씨로 (벽온·역병을 피함)이라고 써서 창문에 붙였다고 전한다.

또 조선 후기 학자인 구상덕(1706~1761)승총명록(勝聰明錄)’ 174410월 초6일 일기의 도림산인을 불러 옥추경을 낭독하게 해 액막이를 했다는 내용 등을 통해 당시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 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천연두를 부르는 마마신(女馬女馬神)을 달래 내쫓기 위해 벌였던 마마굿에 사용된 짚말 등도 볼 수 있다.

콜레라가 창궐하던 1892년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가 쓴 조선 기행에는 콜레라를 막기 위해 집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이는 풍습이 기록돼 있다. 콜레라 증상이 쥐에 물렸을 때와 비슷하다고 해서 쥐신이 들었다고 여겼던 당시 사람들이 고양이 그림을 부적삼아 병이 물러가길 염원했던 것이다.

 

자가격리 생활의 원형이 된 조선시대 피접

조선시대에도 역병이 발생하면 지인의 집으로 피접(避接)을 가고, 집안의 외딴곳에 자신 스스로 격리하는 일 등이 빈번했다.

경남 고성군에 살던 구상덕의 일기 승총명록에 따르면 17481월 그가 살던 마을에 천연두가 퍼졌고 이에 구상덕은 자신의 부모를 경북 갈산의 누이 집으로 긴급히 피신시켰다. 구상덕 자신도 앞서 1740년 역병이 발생했을 때 제자 집으로 몸을 피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활인서(活人署)에서는 재력이 있는 양반들이 감염병 환자들을 집에서 격리시키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한 출막(出幕)이라는 임시 시설을 성 밖에 두고 감염병 환자를 격리해 돌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최대한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격리해 병으로부터의 감염을 막으려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현대의 음압병동과 같이 병원균을 완벽하게 차단하지는 못했겠지만, 현재의 사회적 거리두기나 자가격리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혼식·시험 미루고 제사 축소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전시자료에 따르면 역병의 창궐로 결혼이 연기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상추는 1767425일 일기에 김순을 만나 혼사 일을 의논했는데, 내가 두창 때문에 속히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 친구(김순)가 저쪽에 통지해서 가을까지 기다리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주어서 돌아왔다고 썼다.

앞서 417일 노상추가 살던 마을에 천연두가 퍼진 사실이 알려졌고, 노상추는 감염을 우려해 여동생의 혼인을 주선한 이와 만나 혼례를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여동생은 천연두에 걸려 발병 보름만인 630일 숨을 거뒀다.

1779년에도 마을에 전염병의 기운이 있어서 제사를 간소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1786년 조선 문신 유만주도 홍역을 앓다 죽은 아이의 제사를 지내야 할지 고민한 흔적을 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6년인 1680년 두창이 돌자, 궁궐 출입자를 단속하고 과거시험도 창덕궁 인정전으로 옮겨 시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 때에는 서울의 콜레라로 러시아 통역관이 사망하는가 하면 영친왕이 사신 접견을 미루기도 했다.

 

코로나19 시대의 일상도 엿볼 수 있어

코로나19 시대 한 자가격리자의 그림일기
코로나19 시대 한 자가격리자의 그림일기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이번 전시는 코로나19와 관련된 기록도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고민 끝에 결혼식을 진행한 데에 따라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청첩장부터 종갓집 제사 후 음복을 대체한 도시락 재현품 등을 코로나19 시대의 기록으로 전시한다. 또 코로나19로 인해 늘어난 택배상자, 마스크 등도 벽면 한편에 놓아두었다.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 한 자가격리자가 기록한 그림일기도 눈에 띈다. 코로나19 확진자와 밀접 접촉해 집에서 격리 생활을 했던 시민이 자신의 생활을 그림과 글로 표현한 것으로, 격리 생활 동안의 경험과 감정이 드러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 나날들과, 이를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곧 민속이라는 박물관 측의 전언에 따라 코로나19 시대의 기록 또한 묵재일기, 노상추일기와 같이 후대에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국립민속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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