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침 저녁의 찬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진다. 따뜻한 볕과 선선한 바람이 함께 드리우니 잠시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도 그대로 쭉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주말이면 공원으로, 고궁으로, 숲으로 산책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살랑이는 바람 덕분에 매번 보는 풍경도 어쩐지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이 계절, 수많은 이야기와 반짝이는 영감으로 점철돼 사색하며 걷기 딱 좋은 가을 산책로 두 곳으로 떠나보자.

 

초량 이바구길 곳곳에는 산복도로 동네의 옛 기억을 간직한 담장갤러리가 있다. 	※사진=공공누리
초량 이바구길 곳곳에는 산복도로 동네의 옛 기억을 간직한 담장갤러리가 있다. ※사진=공공누리

어제의 기억이 오늘의 이야기로 피어나는 곳, 초량 이바구길

부산의 바다와 산동네를 이어주는 산복도로. 산의 허리 지난다 해 이름 지어진 산복도로에는 무수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초량 이바구길은 근현대 역사의 씨앗이 곳곳에서 이야기꽃으로 피어나는 골목길이다.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부터 층계마다 피란민들의 설움이 밴 ‘168계단’, 가냘픈 어깨로 가족의 생계를 지탱했던 신발공장 여공들의 발길이 오가던 누나의 길까지, 이바구길은 근현대 부산의 옛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산책은 옛 백제병원부터 시작한다. 1922년 설립된 서양식 5층 건물의 백제병원은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이다. 이후 중화민국 영사관, 치안대사무소, 중국요리집 등을 거쳐 지금은 브라운핸즈백제라는 카페가 되었다. 100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붉은 벽돌과 은은한 커피향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제병원 바로 옆으로 눈을 돌리면 역시 부산 최초의 창고로 알려진 남선창고 터가 보인다. 부산의 명태는 모두 이곳에서 보관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명태를 보관해 명태고방으로도 불렸다. 지금은 명태도, 창고도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았다.

옛 초량동의 풍경과 산복도로 시인강영환의 시가 이어지는 담장갤러리, 근대사를 이끈 동구 출신 인물을 회고하는 동구 인물사 담장을 지나면 초량 이바구길의 명울, 168계단에 다다르게 된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초량 168계단은 옛날,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모서리가 닳도록 오르내리던 계단이다.  	※사진=공공누리
보기만 해도 아찔한 초량 168계단은 옛날,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모서리가 닳도록 오르내리던 계단이다. ※사진=공공누리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길고 가파른 168계단은 부산항에서 일하던 아버지들에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계단 아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생명수가 돼준 우물이 있었는데, 산복도로 아지매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이 절벽 같은 계단을 오르내렸다. 2016년 모노레일 설치 후 산복도로 주민들의 거친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었지만, 아찔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 시절 아버지 어머니의 짙은 애환이 아직도 이곳에서 속살거리는 듯하다.

168계단을 오르면 부산항이 파노라마 뷰로 내려다보이는 김민부 전망대에서 숨을 고를 수 있다. 이어 유치환 우체통과 이바구 공작소, 그리고 가난한 영양실조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처방전으로 내주었다는 장기려 박사 기념관 더 나눔센터도 꼭 들러보자. 산복도로를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산동네 마을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청명한 가을하늘 닮은 도자기 세계로, 이천도자예술마을 예스파크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자기 마을이자 예술인 마을인 예스파크에는 작가들의 개성만큼이나 감각적이고 개성 있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자기 마을이자 예술인 마을인 예스파크에는 작가들의 개성만큼이나 감각적이고 개성 있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수백 개에 달하는 공방과 요장 등이 모여 있는 이천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자기 도시다. 도자 도시답게 도자기 공방과 요장이 모여 생긴 크고 작은 도자기 마을도 여럿 있다. 이천도자예술마을 예스파크는 이천의 대표적인 도자기 마을이다. 2010년 유네스코로 창의도시 공예와 민속 예술분야에 선정된 이천시가 2018, 그야말로 작정하고 만든 도자예술특구 지역이다. ‘다양한 예술과 기술이 모여 만든 마을이라는 뜻의 예스파크(’s Park)’라는 예쁜 이름도 갖게 되었다.

406600(123000) 규모의 예스파크는 회랑마을과 가마마을, 별마을, 사부작마을 등 4개의 테마 마을과 카페거리, 야외 대공연장으로 이뤄진다. 마을 안에는 300여 곳의 공예 공방과 작가 500여 명이 모여 있다. 도예가와 예술가들의 주거지가 함께 있어 하루 종일을 돌아다녀도 마을 전체를 모두 보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자칭·타칭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술가 마을인 이곳에서는 매일 도자기를 중심으로 유리, 옻칠, 섬유공예, 목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품들이 탄생한다.

공방 안 도자기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더 찬란하다.
공방 안 도자기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더 찬란하다.

작가의 개성만큼이나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공방들은 공예품 제작뿐만 아니라 전시 판매, 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즐길거리를 선사한다. 대부분이 도자 공방이지만 개중에는 아트 스테이(예술 민박)를 운영하는 곳도 있고, ‘나만의 서핑 보드를 만들 수 있는 목공방, 유리공예를 체험할 수 있는 유리공방 등도 있다. 여기에 연중 수시로 열리는 마을 행사와 플리마켓, 버스킹 공연, 예술인 기획 전시 등은 더 큰 재미를 더한다.

물론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해도 아기자기한 찻잔부터 고아한 기품을 뽐내는 달항아리까지 전통과 트렌드를 넘나드는 작품 감상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지만 말이다.

커다란 통기타 모양의 건물인 세라 기타 문화관과 짙은 코발트 색의 당나귀 조각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갤러리 더 화SNS에서 인기 있는 포토 스폿이다. 예술인 마을에서 받은 영감을 사진 작품으로 표현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산책 후에는 이천 쌀밥 정식을 먹으러 가보자. 예스파크에서 나와 경충대로를 쭉 따라가다 보면 덕제궁’, ‘이천쌀밥집’, ‘임금님 쌀밥집등 커다란 식당들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음식점마다 약간의 가격차이가 있지만 죽과 전, 샐러드와 묵, 잡채 등의 전채 요리 또한 비슷하다. 장어구이, 갈치조림, 구절판, 갈비찜, 간장게장, 삼합, 홍어회무침 등 메인메뉴에서 한두 가지의 차이가 난다.

그래도 모든 가격대의 정식에 이천돌솥쌀밥이 들어가는 것은 똑같다. 특별히 좋아하는 반찬이 있다면 가장 저렴한 정식에 단품을 더해 맛보는 것도 방법이다.

한상 가득 채운 반찬과 돌솥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든 숭늉까지 말끔히 해치우고 나면 어느새 부른 배를 내민 채 임금님처럼 뒷짐 지고 걷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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