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반도체·배터리 투자시
상당수 중소기업 동반진출
패러다임 변화 따라잡아야

김광훈 칼럼니스트
김광훈 칼럼니스트

몇 년 전 반도체 외주가공 분야에서 세계 1위 업체인 ASE사의 대만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업계 선두업체답게 최신 생산 설비와 자동 물류 시스템도 인상적이었지만,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마다 부착돼 있던 영어 숙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필자 앞에는 ‘with flying colors’ (크게 성공하여)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전함이 깃발(colors)을 높이 올리고 휘날리며 돌아오던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사소한 일인 듯하지만 그들의 실용적인 면을 보고 잠시 전율을 느꼈다.

대만의 또 다른 간판업체인 TSMC는 규모는 물론 기술력과 수익성까지 세계적인 업체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지만, 사실 업종 자체가 그리 화려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잘 안 쓰지만 예전 표현을 빌면 외주 하청업체다.

이런 빛이 나지 않는 업종에서 실속을 알뜰히 챙기는 중화자본의 상혼이 느껴진다. 이들은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예전에 일본의 한 유명 제조 대기업이 마른 수건을 짜는 경영을 한다고 요란했지만, 상당수 성공적인 중국 기업들은 구호에 앞서 평소에 실행하고 있다.

기업이나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는 미래의 성장 동력과 먹거리를 위해선 한시도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과제다. 꼭 필요한 복지에는 예산이 사용돼야 하겠지만 선심성 예산으로 실기하는 일이 없는지 냉정히 살펴보아야 할 듯하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보스턴 인근의 128번 루트는 실리콘 밸리를 능가하는 산업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캘리포니아 하나만 따로 분리해도 세계 5위권의 경제력을 가지는 원천이 여기서 나올 것이다.

치열하고 빠른 기술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글로벌 경쟁이 증가하는 가운데 보스턴의 융통성 없는 계층구조에 반하여 실리콘 밸리가 협업 경쟁과 개방된 문화로 형성된 네트워크 기반 구조를 통해 당시의 변화를 잘 활용한 결과다. 보수적인 동부의 주 정부와 기업인들 그리고 주민들 간에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최근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을 통해 모처럼 조성된 국내 반도체 투자 관련 언론의 관심과 정책을 보고 보스턴 루트 128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E-커머스, 공유 자동차, 온라인 뉴스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적 붕괴에 따른 신 산업의 출현은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통해 대기업을 유치하려는 소위 스모크스택 체이싱(smokestack chasing) 방식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식 경제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종래의 대규모 제조업처럼 교외의 넓은 부지보다는 도심의 테크노 밸리형 공장이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요즘 세대는 저렴한 주택, 교통, 학교의 접근성 외에 풍부한 문화적, 사회적, 자연적 시설을 갖춘 커뮤니티를 선호하고 있다. 주택 공급 정책도 이런 특성을 내다보고 수립해야 할 듯싶다.

실제 사용할지 또 실효성이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반도체, 배터리 등 대미 협상에서 우리가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 대규모 투자인 만큼 정책적 고려보다 기업의 냉정한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겠지만, 이미 경험해 봐서 알 듯이 미국에서 공장을 운영한다는 게 쉽지 않다. 대기업이 혼자 가는 게 아니다. 계약 조건이나 현지 여건에 따라 로컬 업체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과 협업하던 중소기업들도 상당수 함께 진출하기 마련이다.

기업이 어디에 있건 우리의 자본과 기술로 우리가 운영한다면 그건 우리의 전함이다. 그들은 결산을 통해 정기적으로 귀국한다. 모두가 승전보를 가지고 깃발을 날리며매년 모국에 돌아오기를 힘껏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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