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사이트] 한미약품의 어제·오늘·내일

국내 제약업계의 1세대 대표주자이자, 한미약품그룹 창업주인 임성기 회장이 2일 새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

1940년 경기 김포에서 태어난 임성기 회장은 중앙대 약대를 졸업한 뒤, 1967년 서울 동대문에 임성기 약국을 열며 제약업계에 첫 발을 디뎠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임 회장 덕에 임성기 약국은 서울 시내 3대 약국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입소문을 탔다.

임 회장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제약사를 직접 차리고 나섰다. 1973년 임성기 제약을 창업하고, 같은 해 한미약품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48년간 회사를 이끌며 임 회장은 한미약품을 연매출 1조원대 기업으로 키워냈다.

임 회장은 국내 제약업계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장본인이다. 이전 복제약 생산에 머물러있던 업계 분위기를 타파하고, 신약 개발에 적극 투자하며 독보적인 성과를 일구어 냈다.

임 회장은 이른바 한국형 연구개발(R&D) 전략을 통한 제약강국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한편으론 복제약을 생산 판매하며 회사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복제약으로 얻은 수익을 활용해 신약 개발에 투자했다. 단기적으로는 개량 신약을 개발하고, 장기적으로는 혁신 신약을 연구했다.

 

20여년간 R&D2조 투자

한미약품은 해마다 매출액의 20% 정도를 신약개발에 투자했다. 최근 20여년간 한미약품이 연구개발에 투자한 금액만 2조원에 이른다. 임 회장의 신약개발 의지는 단호했다. “연구개발이 없는 제약회사는 죽은 기업이다. 연구개발은 내 목숨과 같다는 게 평소 임 회장의 지론이다.

결연한 의지와 지속적인 실천 아래 한미약품은 1989년 마침내 첫 기술 수출에 성공했다. 글로벌 제약기업 로슈에 항생제 세프트리악손의 제조기술을 수출한 것. 이는 국내 제약사 중 최초의 기술 수출 사례로, 국내 제약업계가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는 모범 사례가 됐다.

이어 1997년에는 글로벌 기업 노바티스을 상대로 계약을 맺고, ‘마이크로에멀젼제제 기술을 이전했다. 금액은 당시 최고 규모인 6300만 달러(750억원) 였다. 외환위기로 고통받던 대한민국에 큰 힘이 됐다.

임 회장은 경영 상황이 악화될 때에도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2000년 의약분업이 시행되며 국내 제약회사 대부분이 투자를 축소했다. 하지만 임 회장은 이때에도 과감하게 연구개발에 투자했고, 덕분에 달콤한 성과도 거두었다. 2003년 국내 최초의 개량 신약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출시에 성공했고, 2009년엔 국내 최초 복합 신약인 고혈압치료제 아모잘탄을 선보였다.

2010년 한미약품은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냈다. 정부가 제약업계 리베이트 단속에 나서며, 한미약품도 타격을 입었다. 외부 투자자는 물론 회사 내부에서도 연구개발비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임 회장은 오히려 정반대로 신약개발이야말로 제약회사가 나아갈 길이라며, 연구개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2014년 기준 국내 상장 제약사들이 매출 대비 8.3%를 평균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했지만, 한미약품은 20% 이상을 쏟아부었다. 연구개발비가 급증해 회사가 곧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2015년 투자 성과가 꽃 피우며, 분위기 급반전을 이루어냈다. 한미약품은 2015년 한 해 동안 신약 라이선스 계약을 7건이나 잇따라 맺었다. 얀센, 베링거 잉겔하임 등 글로벌 제약기업과 8조원에 달하는 기술 계약을 체결하며 업계의 부러움을 샀다. 그해 한미약품이 올린 영업이익은 2118억원으로 역대급으로 높다.

하지만 해가 넘어가며 기술계약 중 일부가 반환되는 시련도 겪었다.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였다. 거품론이 일부 제기되기도 했다. 임 회장은 그러나 전체 임원 회의에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은 외롭고 힘들지만, 그 길에 창조와 혁신이 있다며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미약품은 기술반환된 신약후보물질을 또 다른 대형 제약사에 더 비싸게 수출시키며 분위기를 재역전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

[타계한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
복제약 판매수익 신약개발에 투자

개량·혁신 신약연구 투트랙추진

글로벌사 로슈에 국내 첫 기술수출
의약분업 등 위기 때도 R&D 고수

코로나로 세계 헬스케어 시장 급랭
2세 경영 개시, 선대 철학 승계 관심


8월 한미약품은 미국 제약사 MSD에 비알코올성 지방간염(NASH) 바이오 신약물질 ‘LAPSGLP/Glucagon 수용체 듀얼 아고니스트(LAPS GLP/Glucagon receptor dual agoinst)’ 87000만 달러(1조원)에 기술 수출했는데, 이 신약물질은 2015년 얀센에 수출했다가 지난해 반환된 바 있다. 얀센은 이 약물을 당뇨를 동반한 비만환자 치료제로 개발할 목적이었지만, MSD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치료제로 개발할 계획이다.

 

한국서 가장 혁신적 제약사 꼽혀

한미약품의 연구개발 능력은 객관적인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2019년 글로벌 학술정보 전문 업체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한국 제약사 중 가장 혁신적인 제약회사로 한미약품을 꼽았다. 클래리베이트는 혁신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로 신약 파이프라인과 산학연 파트너십 여부, 상용화 가능성, 영향력 있는 학술지 출간, 글로벌 진출 가능성 등을 활용하고 있다.

한편 임 회장은 경영 성과를 임직원과 함께 나누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2016년 임 회장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한미사이언스 주식 1100억원 어치를 선뜻 7개 계열사 임직원 2800명에게 무상 지급했다.

과거 회사가 어려워 월급을 동결했을 때에도 임직원들이 함께 뜻을 모아 연구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은 데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시한 것이다. 임 회장의 생전 경영활동은 제약업계뿐 아니라 재계 전반에 묵직한 존재감을 남겨주고 있다.

임 회장의 타계 이후 그룹 경영은 오너 2세들이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임 회장은 슬하에2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임종윤 사장은 한미사이언스 대표를 맡고 있고, 장녀 임주현 부사장은 한미약품에서 인적자원 및 글로벌 전략을 책임지고 있으며, 차남 임종훈 부사장은 한미약품 경영기획과 한미헬스케어 대표를 맡고 있다.

한미약품그룹은 2010년 이후 지주사 한미사이언스를 정점으로 그 아래 한미약품, 북경한미약품, 온라인팜, 제이브이엠, 한미재팬, 한미유럽 등을 거느리는 체제로 개편됐다.

이변이 없는 한 장남 임종윤 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임 사장은 일찍부터 후계자로 낙점돼 그룹을 이끌어왔다. 임 사장은 2010년부터 임성기 회장과 함께 한미사이언스 각자 대표로 있었고, 부친이 물러난 2016년부터는 단독으로 대표를 맡아 지주사 경영을 이끌고 있다.

 

장남 임종윤 사장 승계 유력

임 사장은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뒤, 2000년 한미약품으로 입사해, 이후 북경한미약품 기획실장, 북경한미약품 부총경리(부사장), 북경한미약품 총경리(사장), 한미약품 사장 등을 거쳐 현재 자리에 올랐다. 임 사장은 북경한미약품을 크게 성장시키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2003200억원이던 북경한미약품 연매출은 20192544억원으로 10배 이상 상승했다.

지분 승계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임 회장은 한미사이언스 지분 34.27%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세 남매는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각각 3.65% 3.55% 3.14% 씩 보유하고 있다. 만약 법정 비율대로 상속하면 임 회장의 부인 송영숙 여사가 가장 많은 상속분을 받아 한미사이언스 최대주주에 오른다.

다만 임 회장이 유언을 통해 상속 비율을 따로 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종윤 사장이 한미사이언스 대표로 활동하며 그룹 경영을 지휘해온 만큼, 임 사장에게 가장 많은 상속분을 넘겼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미사이언스은 그룹내 주력 사업회사인 한미약품의 지분 41.39%를 갖고 한미약품을 지배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전세계 헬스케어 시장은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한미약품도 상반기 성적에 먹구름이 꼈다. 한미약품은 2분기 연결회계 기준 2434억원 매출과 106억원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10%, 54% 감소한 수치다.

코로나19 영향이 큰 북경한미약품의 경우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52% 급감한 271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섰다. 이같은 와중에 한미약품과 MSD가 맺은 1조원 수출계약은 가뭄에 단 비가 아닐 수 없다. 임성기 회장은 평소 준비된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경영 철학을 강조했다고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귓전을 맴도는 말이다.

 

- 차병선 기업전문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션 신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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