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니까.”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이 말.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진리인 것처럼만 여겨진다. 일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버릇처럼 말한다. “주어진 시간은 똑같잖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진리의 파급력은 실로 엄청나다.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다는 문장은 그러니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다와 연결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공정하다’, 나아가 네가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네가 게을렀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게으름을 비난하기 위해 시간은 공평하다는 명제를 끌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로 우리는 똑같은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정말로 시간은 공평할까?

 

여기, 중소기업을 다니는 한 회사원이 있다. 이름은 박개미 씨.

박개미 씨는 막 퇴근해 집에 들어온 참이다. 씻고 저녁을 먹자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밀린 집안일이 눈에 들어오지만, 박개미 씨는 애써 무시하고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내일 무리 없이 출근하려면 지금 자야 하는데. 왠지 그냥 자는 것은 너무 아쉬워서 SNS 등을 뒤적거리다가 새벽 1시쯤에야 잠이 든다. 지금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너무나 피곤할 게 뻔한 데도.

어딘지 익숙하다. 평범한 우리네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저녁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보며 ,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이대로 잠들고 싶진 않다.’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온전히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때는 바로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우리 개개인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시간만이 인간이 인간답게 누리는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법정 노동 시간은 물론 법률상 휴게 시간으로 불리는 점심시간 때에도, 심지어 퇴근한 후에도 노동을 끝내지 못한 채 붙들려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답게 누릴 수 있는 시간, 이 자유시간의 길이는 과연 공평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기, 두 아이가 있다. 김민지와 박현수.

김민지는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집안 살림에 전액장학생을 지원했지만 탈락했다. 대신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은 뒤 카페로 출근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김민지의 4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노동과 공부, 그리고 빚으로 채워진다. 한편 박현수는 자율형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민지와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김민지가 대학생이자 카페 알바생으로 살아가는 사이, 해외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의 무급 인턴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박현수의 이력서에 들어갈 문구들이 착실히 쌓여간다. 김민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그리고 그중에서 자신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한 곳을 다니며 더 나은 회사의 정규직 준비를 하는 동안 박현수는 무급 인턴으로 일했던 대기업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을 입학했던 두 사람. 과연 10년 뒤에도 둘은 같은 자리에 서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분명 박현수가 김민지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김민지의 노력이 박현수의 노력보다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김민지가 더 노력했다면 박현수만큼, 아니 박현수보다 높이 올라갈 수 있었을까? 백 퍼센트, 그럴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민지와 박현수,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오로지 출생에 달려 있었다. 이 둘의 출생을 가른 것은 운이었다. 능력도 의지도 아닌 운(, luck) 말이다. 이 운을 배제하고 이야기하는 공정이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문장과 으레 이어지는 노력하면 다 된다혹은 게으름은 죄다라는 말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김민지가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한 이유를 김민지의 노력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의 저자 양승광은 우리에게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뻔하디뻔한 명제에서 벗어나 볼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던 노력하면 다 된다게으름은 죄다라는 두 문구는 사실, ()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오롯이 자유롭고 잉여롭게 쓰기 위해서는 우리를 채찍질하는 이런 말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각을 좀 더 넓혀서 시간과 사회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이제 다시 한번 나의 하루를 구성하고 있는 시간을 바라보자. 성과만을 요구하는 사회의 눈이 아닌, 이 세상의 중심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눈으로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가 누리는 시간이 많아질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자. 개인의 삶을 이루는 시간은 삶 그 자체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 시간 역시 끝난다. 우리에게 허투루 낭비될 수 있는 시간이란 없다. 더 이상 다른 이를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이용하지 말자. 나만이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우리 자신에게 잉여로운 시간을 허해보자.

 

-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 한국출판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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