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간의 장기 출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날은 절반뿐이었다. 경상도를 시작으로 연일 쏟아지는 비. 허허롭게 궂은 날씨만 탓하면서 철쭉 군락지 주변만 맴돌다 미련을 벗어던지기로 했다. 결국 두어주만에 다시 고창 땅을 밟기로 한다. 청보리 이삭이 영글지 않았던 것을 위안삼아 지금쯤은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지금 남녘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보리를 보기 위해 고창으로 달려간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공음면 선동리의 학원농장에서 청보리 축제(4월18일~5월 16일까지)가 열리기 때문이다. 아니 축제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축제장에서 뜨거운 햇살과 함께 찾아든 인파의 번잡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창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서둘러 공음으로 향한다. 매스컴의 ‘약발’이 끝난 탓인지 아니면 시간이 일러서인지 관광객들은 많이 눈에 띄질 않는다. 천천히 학원농장(063-564-9897) 안을 훑어보면서 사진 포인트를 찾기 시작한다. 보리 이삭은 두드러지게 크지는 않았다. 아마도 척박한 땅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이 다른 청보리 밭과 다른 점은 바로 구릉지대라는 점이다. 구릉이어서 무의미한 평평한 보리밭하고는 차별이 된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너른 들이 온통 푸르고 보리들이 빼곡하다. 중간에 관광객들을 위해서 산책로를 내 놓았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보리밭은 한없이 이어진다. 20만평이나 되는 규모니 차로 돌아도 끝이 없는 듯 넓게 느껴진다. 넓은 들녘에 펼쳐지는 보리밭은 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마치 파도가 일렁거리듯…. 보릿대 사이사이에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나 노란 유채꽃이 함께 춤을 추면서 일렁거린다. 오리저수지, 기와집, 왕대나무 밭 등의 표시가 있지만 어디 보리밭만큼 아름다운 곳이 있겠는가?
서둘러 나온 사진가 이외에는 관광객은 만날 수 없다. 우연히 산책하러 나온 아주머니를 만나 오리저수지가 어디인지 물어보게 된다. 보리밭 사잇길로 가면 기와집이 한 채 있는데 그곳 앞 연못에 오리가 있다는 것이다. 오리저수지라는 것은 오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었던 게다. 그녀는 그 집을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별장이라고 알려준다.
돌아와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는 듯하다. 학원농장은 바로 진 총리의 장남인 진영호 씨가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원농장은 어머니인 이학 여사가 처음 개간했다고 한다. 1960년대엔 이런 곳에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했을 정도로 잡목만 무성했던 야산. 마을 사람들이 땔감이나 얻었던 불모지를 사서 개간했다. 원래 두루미가 많이 날아들던 곳으로 황새골이라 불렸다. 학원(鶴苑)이란 이름도 학이 많다는 뜻이다.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지냈던 그는 어려서부터 농군이 꿈. 그는 92년 사표를 쓰고 들어와 농군이 됐다. 잠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리수확이 끝나면 이내 메밀꽃을 심는다고 한다. 가을철 메밀꽃밭과 선운사 상사화를 머릿속에 새겨 넣어 본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축제가 끝났을 터. 청보리도 좋지만 누렇게 변해가는 보리밭 구경도 괜찮다. 곤궁하던 시절, 보리가 익어갈 무렵이면 불을 지펴 보리를 구워 먹던 시절. 떠나가는 봄을 아쉬워 하듯 그리움을 가슴속에 안아보는 진한 감상에 빠져 들어보자.
■자가운전 : 서해안고속도로-고창IC-796번 지방도(무장 방향)-무장읍내에서 공음 방향 796번 지방도를 따라 4㎞를 가면 청보리라는 팻말이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정읍IC에서 빠져 22, 23번 국도로 고창읍에 들어가거나, 백양사IC로 나와 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고창읍에 닿는 방법이 있다.

◇사진설명 : ♪보리밭~ 사이길로…♬. 끝없이 펼쳐진 전북 고창 공음면의 청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풍경이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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