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특파원으로 일 할 당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서울에서 갑자기 구체적인 촬영대상을 적시하며 취재지시를 해 오는 것이었다.
한국과 6시간의 시차와 오전 10시는 돼야 업무를 시작하는 러시아의 일상 때문에 전화를 일찍 받는다 해도 막상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서울시간으로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을 무렵이 된다.
결국 촬영이나 인터뷰를 마치고 막히는 시내 도로를 조바심내며 달려가서 위성 송출 포인트에 도착해 차안에서 작성한 기사를 허겁지겁 읽고 영상 편집을 마치는 일련의 과정을 3시간 정도 안에 모두 끝내야만 서울의 SBS 8시 뉴스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장애는 이른바 ‘삐스모(PISMO) 문화’라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서 촬영을 하든지, 누구와 인터뷰를 하든지 일반 개인이 아니면 사전에 편지(러시아말로 ‘Pismo’)로 촬영 혹은 인터뷰 요청서를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취재요청은 무조건 서신으로
그런 후에도 3, 4차례는 서신이 오가야만 된다. 그러고도 막상 한달 후 예정된 촬영일자가 다 돼서는 ‘우리 쪽 시간이 안되겠다’고 거절당하는 예도 있다.
결국 핵심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그 비서를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서 편지 대신 ‘다른 것’이 든 편지봉투를 전하는 방법이 대개의 해결책이다.
너무 바빠 준비가 안 돼 있을 때는 조만간 시내 고급 한국 식당으로 초대해 ‘보드카라도 한잔하자’는 제의를 해야한다.
말레이시아에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수랏(surat) 문화’가 생활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뉴스 소재란 것은 그 속성상 ‘한달 전’에 기획될 수가 없는 것이기에 하루 이틀 전 전화로 취재요청을 하면 ‘편지를 보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가 관련자들에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취재가 필요한 날은 지나가버리고 만다.
한국식으로 카메라팀과 들이닥치면 여지없이 거절이고 문전박대다. 유일한 예외는 최고 책임자가 허락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도 단 몇 시간 전에라도 담당자에게 편지가 전달돼야만 한다.
담당자가 자리를 자주 비우고 전화를 받지 않거나 회신전화를 잘 해주지 않아 이쪽을 애를 태우게 하는 점도 러시아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수단’을 써서는 절대 안된다. 오직 예의바름과 간절한 눈길로 승부해야만 한다. 그러면 간혹 ‘모르는 척 할 테니 얼른 멀리서 찍고 사라지라’는 눈치가 전해져 올 수도 있다.
최근 쿠알라룸푸르를 다녀간 모 방송의 취재팀은 한 외국인 학교의 이름만 듣고 찾아왔다가 이틀이나 수위로부터 문전박대만 당하고 끝내 교장 인터뷰는 하지 못한 채 도로건너 멀리서 학교 외경만 찍고는 돌아갔다.

현지 상황 철저히 파악해야
기자들은 그렇다고 하지만 기업하는 분들이나 영업하는 분들은 어떠한가?
기업에서는 매년 경영계획도 수립되고 수시로 그것이 수정보완되며 경영이 이뤄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지시를 받는 직원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한국식’접근법은 일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맨땅 두드기기’식으로 판매시장 개척을 위해 콸라룸푸르를 누비고 다니는 영업인들을 가끔 한국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대개는 소기업의 직원일 수밖에 없는데 그리 유창하지 않은 영어에다가 오직 ‘품질’만을 믿고 외국을 찾아오는 경우다. 이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장 명의의 편지’를 영문으로 써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영문 명함 하나 들고 KOTRA 등에서 입수한 관계 업체 명단을 들고 하루종일 발품을 팔다가는 저녁 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수한 한국 식당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와 정서가 비슷하고 딱 맞는 아이템을 찾고 있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을 만나지 않는 한, 그 직원은 본사에 돌아가 ‘해외출장비만 축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회사 높은 분들은 부하직원들이 미리 정해둔 일정에 따라 고급 호텔에 묵으며 높은 분들 만나서 골프 쳐가며 해외출장 다녀오셨다고 “그 나라 가면 모두 다 잘 돼”하면서 적은 출장비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 부하 직원들을 다그쳐서는 안된다.
서신문화는 ‘낡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클릭 한번이면 메일이 날아가고 현장 사진을 바로 찍어 보내고 하는 세상에서 ‘Pismo’니 ‘Surat’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답답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IT산업의 수준이 비슷한 나라는 미국, 일본 정도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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