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훈(ASE코리아 본부장)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에 대한 영어 번역을 얼마 전 요청 받았다. 사명감이 투철한 번역가들은 때로 한줄의 가장 적확한 번역을 위해 고심하느라 며칠 진도를 못 나가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덜컥 겁도 났다.

더욱이 평소에는 기술, 계약서, 품질 관련 문건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소 생소한 분야라 막막했지만, 사명감으로 착수하니 할 만했다.

수원 화성은 성곽도 아름답지만, 주변의 경관 또한 수려하다. 산새나 작은 동물들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명소라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나라에 산성이 발달한 이유는 골짜기가 발달해 방어에 유리한 데다 물을 구하기 쉬운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평지에 있는 성 안팎의 재산을 버리고 산성에 피난하게 되니 재산상의 피해가 작지 않아 불리한 면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고민에 대한 해결책으로 방어와 공격 능력을 갖춘 평지의 성이 필요하게 됐다. 그러한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한 사실상의 첫 결실이 수원 화성이었다. 물론 수원 화성은 정조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산물이기도 했지만, 다산 정약용의 입안과 거중기 사용 등 실학 정신이 고스란히 담아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더욱이 국가적인 대역사가 있을 때마다 백성의 강제적인 노역이 있었으나 이 시기부터 직종마다 비교적 적절한 노임을 지급하고 공사가 이뤄졌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성의 주요 시설로는 지휘소 역할을 했던 서장대, 동장대, 속이 비어 있고 나선형 계단이 내부로 나 있는 관측 및 공격 시설로 쓰였던 공심돈,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치(turret)가 곳곳에 있는데 이는 재상으로 임진왜란을 치르고 징비록으로 후세에 유비무환을 가르치려던 류성룡의 주장과 권고가 채택된 것이기도 하다.

새삼 전쟁 시 방어시설이었던 수원 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계에 대한 고심과 국가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는 국민들의 팍팍한 삶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지만, 여전히 한반도 주변의 열강들은 100여년 전이나 다름없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이웃 나라들은 인구가 훨씬 많고 민족도 다양한데도 잘도 통일하곤 하는데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게 반도 국가의 운명일 수도 있지만, 반도 국가라고 해서 거기에 갇혀 웅지를 펴지 못하라는 법이 없다.

브렉시트와 사드 여파에, 경제에 주름이 가 모두 버겁지고 특히 소상공인이 더욱 힘들어진 세상이다.

그래도 우리 동네 장작 구이의 신화에서 희망을 찾는다. 작은 트럭에 장작 구이 설비를 설치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인 기업으로 장사하던 사람이 있었다. 작은 규모지만 그 트럭에는 XXX 장작 구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몇년 전 집 근처에 대형 음식점을 인수해 30여명 가까운 직원을 두는 사장이 됐고 늘 성업 중이다.

번번한 건물조차 없던 학교에 대형 정문을 세운다고 조롱을 받던 경희대 창업자 조영식 이사장이 생각난다. 나중에 캠퍼스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자 그 대형 정문은 오히려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가난한 사람은 한끼, 중산층은 두끼, 부유한 계층이나 세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현재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우리들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언덕길을 오르고 있으면 제대로 가고 있다는 말이 더욱 실감 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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