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훈(ASE코리아 본부장)

1978년에 입사했다는 모 전자 대기업의 고문을 최근에 만났다. 당시 월급이 15만원 내외쯤 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그 돈이면 충분히 쓰고도 남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동네에 있던 중견 전자기업 생산직 여사원의 월급이 3만원이었을 때니 그 말이 실감이 났다.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취업한 것은 상급학교 진학이나 군 복무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이보다 5~6년 뒤쯤이다.

전쟁 중에는 주 전투원인 남자의 사망이 많아서 전쟁 후에는 대체로 남아의 출산이 많다는 통계도 있지만 58년생 개띠 남자가 기업에도 유난히 많았다. 지금보다 평균 결혼 연령이 5년 이상 빨랐기에 이들 중 상당수는 집값 폭등에 따른 큰 차익을 거뒀다. 또 진급도 빨랐다.

하지만 필자같이 그 몇년 뒤에 출생한 2기 베이비붐 세대들은 직급마다 늘어난 승진 연한을 실감했고, 12~15%에 이르는 고율의 이자를 치르며 집을 샀다. 정년이 긴 교직이나 공무원을 제외한 1기가 상당수 퇴직했다.

2기는 기업에 남아 무난히 진급해 고위 임원이 돼 있는 사람도 있고, 교계나 학계에선 교감, 교장이나 학장을 하고 있으며 군인이라면 선임 대령이나 장성의 위치에 있다. 베스트셀러를 낸 사람(김정운, 김난도)도 있고 대선 후보(안철수)로 거론되는 사람도 있다.

미국 유력 잡지에서 보듯 ‘한국인이 몰려오고 있다’라는 미국의 엄살은 80년대부터 시작되더니 필자의 과장 시절인 90년대 중반엔 절정을 이뤄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슈퍼 301조가 맹위를 떨치던 때가 있었다.

무슨 목적으로 주선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변호사들과 무역관계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역센터에서 대규모 콘퍼런스를 하는데 패널도 아닌 필자가 질문 기회를 잡았다. 미국의 유명 변호사에게 “일본이 지난 25년간 4000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한 것에 비하면 한국이 번 돈은 푼돈에 불과하며 이런 압력은 다소 부당한 데가 있다”고 하자 “일본인들이 협상에 너무 능수능란해 한국에 올 때쯤에는 자신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 그런 것 같다”고 그가 응수한 게 기억난다.

이때만 해도 사실 미국에서 운행되는 한국 자동차가 얼마나 드문지 미국인 동료가 소유한 국산 승용차를 보고 눈물이 글썽했던 게 생각난다. 그 후 자동차업계가 품질향상에 전력을 다해 세계 5위권의 자동차 제조국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중소 부품업계의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고비용에 따른 경쟁력 제고는 계속 풀어야 할 숙제다.

우리나라의 GDP가 1조달러를 훌쩍 뛰어넘었으니 그때와 비교하면 경제 규모가 급격히 커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과장하듯이 우리가 중국, 일본,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거대한 경제적 짐승(economic behemoth)은 아직 아니다.

그는 한국의 안보 분담금이 피넛(아주 소액의 돈)에 불과하다며 분담금을 늘리지 않으면 당선 이후 철군도 불사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이는 70년대 카터 시절 이미 겪었던 일이다.

경제적으로는 또 어떤가. 조선업 등 구조조정으로 해당 업계는 물론 관련 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스마트 폰으로 촉발된 반도체, 전자업계의 호황도 주춤하고 북유럽의 상당수 나라나 일본은 이미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정도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또다시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았다.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건대 통한과 질곡의 역사도 있었지만 강소국으로서의 부상을 지켜본 격동과 감격의 세월이었다. 386세대 맏형으로서 민주화의 성취에 대한 약간의 기여와 수출의 첨병으로서 경제의 한 귀퉁이를 담당했다는 자부심도 은근히 있다. 현재가 분명 위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전략이 필요하며 우리는 늘 돌파구를 찾았다. 이는 우리 기업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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