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중호(칼럼니스트·목포대학교 초빙교수)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극을 통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얻고, 해외에도 우리 문화를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에 묘사된 우리 역사와 문화가 사실과 다른 경우가 있다.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 수 있고 폐해가 없던 것도 아니나, 관객들의 호기심이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부정적인 측면이 마치 전부인 양 부각하는 경우가 없는지 의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공(朝貢)에 대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흔히 ‘조공’하면, 상납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사대주의의 징표라며 수치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교육의 영향이 크다.

조공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일방적인 상납이나 착취가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었다. 그래서 조공무역(朝貢貿易), 관무역(官貿易), 또는 공무역(公貿易)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국제간 거래가 민간주도며 자유지만, 전근대 동북아시아에서는 국가에서 임명한 관납상인들에게 상품의 조달권을 독점하게 한 억상정책(抑商政策)으로 관무역만 허용되고, 민간상인에 의한 교역을 금지했다. 더러 소설에서 보는 민간 거상들의 활약이나, 공양미 삼백석에 인당수에 빠지는 ‘효녀 심청전’에서 볼 수 있는 밀무역 같은 민간의 상거래는 희귀한 사례며, 조공무역이 가장 큰 비중의 국제간 교역이었다.

당시 조공은 봉건제에서의 제도로 동북아시아 국제질서며 외교의례였다. 애초 중국은 다른 국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동아시아의 외교질서’가 그러했다. 중국은 조공을 받았다는 점에서 세계가 마치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양 여겼다. 하지만 스페인도 조공을 했고, 영국과 맺은 조약에서도 영국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것으로 돼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조공의 의미는 속국이나 서구식의 식민지 프레임이 아닌 외교관계이며 관무역의 통로였다. 당시의 관행에서 상호 국가이익을 추구한 것으로 오늘의 관점으로 확대해석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편 조공을 받으면 이에 준하는 답례가 있었다. 이를 사여(賜與)라고 한다. 즉 조공과 사여는 한 세트였으며, 사여의 가치가 조공의 가치보다 더 컸기 때문에 조공으로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니다. 유교문화에서 아우 나라의 성의에 대한 형님 나라의 체면 유지비용이었다. 이러한 공물과 답례품은 무역의 형태로 발전했다.

우리는 역대 중국의 왕조와 조공외교를 해왔는데, 이 같은 조공무역을 통해 선진해외문물을 수용하고 무역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조공을 못한 일본은 아시아의 왕따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왜(倭) 또는 일역(日域)이라 했는데, 왜구는 해적의 본거지로 천시한 것이고, 일역은 국제질서의 멤버로 함께하기에 부적절한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일본은 이를 자주성이라고 말하나, 실상은 동아시아에서 외교가의 아웃사이더였다.

고려시대에는 상인단에 의한 교역이 가능했으나, 조선시대 특히 명나라는 조공무역외에는 모든 대외교역을 금했다. 명은 3년에 한번 하는 삼년일공(三年一貢)을 희망했으나, 조선은 더 많은 관무역을 통한 이익을 얻기 위해 연삼공(年三貢)을 주장해 수시로 공물을 보내고 답례품을 받았다. 만약 조공이 착취였다면 횟수를 늘리자고 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고 조공의 폐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이나 청도 조선과의 분쟁이나 경계하던 시절에는 물품을 짜내려 했고, 자신의 질서에 편입됐다고 믿으면 조공관계가 합리적으로 조정됐다. 이런 가운데 우리 조상들은 조공외교를 통해 필요한 선진문물을 들여오고 적지 않은 정치적 ·경제적 실리를 추구했다.

- 글 : 하중호(칼럼니스트·목포대학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