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을 시작한지 2년이 됐을 때인 1975년 가을. KOTRA 취리히 무역관에 근무할 때 전차로 출퇴근했다. 집에서 취리히 기차역까지는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였다.
퇴근길이면 으레 7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노신사 한 분을 만나곤 했다. 왼손엔 낡고 작은 서류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 노신사는 나와 마찬가지로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전차 맨 뒷 차량 좌석에 앉아 있었고 그곳 좌석은 대개 비어 있었다.

몸소 실천하는 모습 감명받아
노신사가 승차할 때 그의 비서로 보이는 20대 젊은이가 옆에서 승차를 도왔다. 그리고 그 노신사는 내가 내려야 할 역 바로 앞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내릴 때는 그의 가족처럼 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기다렸다가 노신사를 부축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9월말경 가끔 비가 오기도 하고 늘 구름이 자주 하늘을 덮어 햇볕을 볼 수 없는 음침한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전철을 타고 퇴근을 하는데 마침 그 노신사의 옆에 서서 가게 됐다.
평소 그에 대해 많이 궁금했던 나는 “나이도 많으시고 편히 걷지도 못하시는데 댁에서 쉬셔도 될텐데 매일 어딜 그리 다녀오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신사는 “어디서 왔냐”, “무슨 일을 하느냐”, “스위스엔 얼마나 있었느냐” 등을 자세히 캐물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스위스 유명제약 재벌회사인 ROSCHER사의 대표이사라고 소개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래서 나는 “승용차를 타시면 운전기사가 잘 모셔다 드릴텐데 왜 그렇게 전차를 이용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선뜻 “회사의 사시(社是)를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ROSCHER사의 사훈이 ‘전세계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고 지키겠다(Wie bewahren qewiss die Gesunelheit der allen menchen inder Welt)’는 것이었는데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차로 출퇴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가 내건 약속 반드시 지켜
그는 4가지 구체적 이유에 대해 설명해줬다. 첫째, 전차의 차로(車路)가 시내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었는데, 전차 차로(車路) 양쪽으로 승용차로가 있어 각각 차 2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았다.
따라서 그의 대형 승용차인 롤스로이스가 가장 붐비는 시간대인 출퇴근시간에 움직이면 응급 앰블런스나 병원 의사들의 길을 막을 수 있어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겠다’는 사시(社是)는 거짓이 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계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된 이후 스위스에서는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공해방지를 나부터 실천하자’는 의미가 있었다.
세 번째, 그는 회사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경비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출퇴근을 전차를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 회사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을 직접 만나 약의 효과 및 평가를 묻고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출퇴근길 속의 전차라는 점이었다.
이같은 그의 진지한 설명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회사가 내건 약속을 위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벌 기업가가 불편한 몸을 감수하고 날마다 전차를 이용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그 노신사의 기억이 내 뇌리 속을 떠나지 않고 항상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요즘같이 국내 사정이 ‘말 따로 행동 따로’인 모습들을 각종 매스컴을 통해 접할 때마다 28년전 만났던 노신사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더욱 뚜렷해 진다.

허상진(안양과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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