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삭스의 오너 월터 삭스는 “우리 회사에는 세 명의 천재가 있었다. 그 중에 역경을 딛고 끝까지 간 사람은 와인버그뿐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공황 당시 풍전등화의 골드만삭스를 구해내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CEO로 재직하며 ‘미스터 월스트리트’라 불렸던 사나이, 그가 바로 시드니 와인버그이다.
1907년 고등학교를 중퇴한 16살의 와인버그는 심부름꾼의 심부름꾼으로 60년간의 골드만삭스 근무를 시작했다. 무려 39년간 CEO로 재직했던 와인버그의 시작은 이렇게나 미약했다.
모자 먼지나 신발 진흙을 터는 허드렛일을 맡아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금융맨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 1930년 마침내 CEO에 등극한다.
당시 골드만삭스는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1928년 12월, 전쟁 특수로 주식시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자, 당시 CEO였던 워딜 캐칭스는 골드만삭스트레이딩컴퍼니(GSTC)라는 신탁회사를 설립해 투자자금 확보에 나섰다. 136.50달러였던 주가가 326달러까지 치솟았지만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0월 주가대폭락으로 GSTC의 주가가 1.75달러까지 폭락했고 막대한 투자자금이 증발하면서 골드만삭스의 명성도 땅에 곤두박질 친다.
당시 캐칭스가 떠난 이후 와인버그는 GSTC의 잔재를 청산하는 고통스런 작업을 묵묵히 수행해내며 골드만삭스를 세계 최고 은행으로 일으켜 세웠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무엇보다 그의 남다른 열정을 들 수 있다. 와인버그는 책임감이 남달랐다. 당시 규모가 크지 않았던 골드만삭스는 신생 기업의 투자업무를 따내야 했는데, 와인버그는 관계 구축을 위해 고객사들의 이사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사를 지위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고객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진정한 이사였다.
“젠체하는 이사의 시대는 지났다. 공적 업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와인버그는 ‘일하는 이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33년 그가 발표한 ‘이사들을 위한 10계명’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문으로 평가받는다. 정기적인 이사회 개최와 감사보고서 제시, 재무현황 보고 등 현대적 이사회의 역할을 정립한 것이다.
이사로서의 책임감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어졌다. 제너럴푸드 이사 재직 당시, 레스토랑에서 크래프트(Kraft)가 아닌 상표의 치즈가 올라오자 웨이터에게 크래프트 치즈를 가져오라고 요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살아생전 와인버그의 사무실에는 타구(唾具)가 하나 진열돼 있었다. 잔심부름꾼으로 입사해 첫 업무로 광을 냈던 것이었다. 가래침을 받아내는 미천한 타구가 수억의 예술품과 나란히 전시되듯,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한 시드니 와인버그의 성공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귀감으로, 전 세계 금융인들의 롤모델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안신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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