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로(1904∼89) 선생에 대해 궁금해진 것은 대전시 취재 후였다, 시립미술관 옆에 있는 고암 이응로 선생 미술관을 찾게 된 것이다. 이응로 선생하면 우선 떠오르는 곳이 예산의 수덕여관이다. 수덕여관은 이응로 선생 본처 박귀옥 살았던 곳이고 그의 부인이라는 것은 인정해주는 것은 그 집 뒤안 우물가에 있던 암각화였다. 두개의 넓다란 바위에 독특한 문자추상화를 새겨 있다. “1969년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새겨진 암각화다.
시립 미술관 옆 건물, 이응로 미술관이 있다. 첫 느낌에서 전율이 인다. 수덕여관 암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그림이다.
1974년에 그렸다는 주역 64괘 차서도 64점이라는데 내 눈에는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보인다. 작은 사람들만 눈에 들어온다. 괘 이름의 획 하나하나를 사람모양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연도를 계산해보면 고암의 말년작품이다. 그저 훑어 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된 내용을 본다. 스페인 사람에게 의뢰를 받아 그렸는데, 의뢰인이 죽어버려 작품으로 남아 있다는 내용인 듯하다. 인터넷 자료를 뒤적여보지만 천편일률적인 내용만 소개하고 있다. 어쨌든 이 전시는 9월 27일까지 열린다
미술관을 빠져 나오면서 안내대에서 묻는다. “파리에서 그림 그리는 여자랑 만나 결혼해서 살았죠? 라고. 안내원은 두 번이 아니고 네 번째 부인이라는 것이다. 네 번이나? 금시초문. 고암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밤새 인터넷을 뒤적거려 자료를 찾다가 제법 잘 아는 듯한 어느 기자가 쓴 내용을 읽게 되는데, 고암 선생의 성격이나 파리 생활 등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화여대 미술학도 1기라는 부인 박인경씨는 지금 8순인데 네 번째라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잠시 고암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간단명료하게 소개하겠느냐마는 지면상 어쩔 수 없다. 그는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이응로 선생은 전주에 가서 처음에는 극장 포스터 그리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뺑기쟁이’라고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고 홍대 교수가 되었고 파리로 건너간다. 파리에서 가난을 면치 못해 반짝 장이 서고 나면 생겨나는 신문 들을 주어 모아 물에 담궈 꼴라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 안통하는 그곳에서 고암은 꼴라주로 파리의 이탈리아 출신 큰 화상 화케티의 눈에 든 것이다. 실력이라는 것은 결국 이렇게 인정되고 마는 듯하다.
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류돼 강제 소환돼 옥고를 치렀다 사면된다. 고국 땅을 밟기로 한 며칠 전, 85세의 노 화가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다. 여러 가지 질곡한 삶을 산 고암 선생의 대표작에 “콤포지션” “작품” “군상” 등이 있다.
너무나 부족한 고암 선생에 대한 설명이다. 좀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고암선생이 옥고를 치를 때 본부인 박귀옥여사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머물던 수덕여관 또한 생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인 나혜석이 살던 곳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혜석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하여튼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알아야 하는지 알면 알수록 갈증이 더 심해진다.
미술관 근처에 한밭수목원(042-472-4972, http://www.daejeon.go.kr/treegarden/)이 있다. 제법 잘 만들어놓은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을 듯하다. 하루 정도 유숙하려면 유성온천쪽으로 가면 된다. 워낙 많은 숙박동이 있어서 가격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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