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던 군산을 다시 찾은 것은 은파유원지의 은빛물빛다리와 채만식 선생의 문학관에 대한 정보를 듣고 서다. 그저 회가 맛있고, 선유도 가려면 으레 거쳐가야 하는 곳이 군산이다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필자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정체’였다. 목포와 비슷한 지형과 분위기를 갖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도심은 소위 말하는 발전의 활황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군산시내를 꼼꼼히 찾아보기로 하고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군산 나들목으로 나와 나포쪽으로 나와 다시 시내쪽으로 들어서면 금강철새조망대(금강철새생태환경관리과:063-453-7213)가 있다. 몇해 전 공사를 하는가 싶더니 겨울이면 철새축제를 하는 등, 제법 역할을 다 하는 듯하다. 이미 철새는 날아가버린 곳이지만 잠시 들러봐도 괜찮은 곳이다.
철새신체탐험전시관, 금강조류생태공원에는 각종 새들이 전시돼 있고, 식물원 등에서는 새들이 날아 다니고, 앵무새도 볼만하다. 그 외에도 전시관에도 생태, 자연학습장으로 도움이 될 듯하다.
이곳을 벗어나 채만식 문학관을 찾는다. 자그마한 건물 속에는 소설가 채만식에 대한 이력과 잡지, 사진, 친필 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해설사는 채만식 선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는 1902년, 군산시 임피면에서 태어났지만 사는 곳은 인근 익산이었다. 튀는 성격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는 그. 일본에서 대학시절 찍었다는 교복과 약간 삐닥하게 쓴 사진 속의 그는 제법 낭만주의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한마디로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탁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소설 속의 배경이 됐다는 조선은행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군산시내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군산여행 팸플릿을 손에 들고 시내 탐험에 나선다.
지도에 표기된 조선은행 자리는 내항 못미쳐 있었는데, 한마디로 폐가가 돼 버렸다. ‘플레이 보이’라는 간판이 남아 있고, 벽면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 건물은 1923년에 일제 식민지 정책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은행의 군산지점으로 건립됐다가 세월 속에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이용되다가 유흥시설로 바뀌었고 불이 난 후 폐허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주변에 있던 장미동 집들은 거의 일본식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겉모습에서는 확인이 어렵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 군산세관 본관(시도기념물 87호, 장미동)의 건물 또한 눈길을 끈다. 조선은행과는 달리 건물은 잘 보전이 돼 있으며 현재는 관람이 가능하다. 이 건물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선박과 물품에 대하여 세금을 거두던 세관이 있던 곳이다. 번듯하게 잘 보전되고 있는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 외에, 곡창 지대인 호남지방에서 쌀 등을 빼앗아 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서 역사의 교훈을 주는 곳이다.
자리를 옮겨 더 시내 깊숙이 일제의 잔재를 찾아 헤매보기로 한다. 월명공원 바로 밑에 있는 해망굴. 차량 이동 대신 사람만 통과하고 있는 이 해망굴은 일제시대 군산항의 제3차 축항공사 기간이었던 1926년, 구)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반원형 터널(높이131m 길이 4.5m)로 만들어진 곳이란다.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 부대 지휘소가 터널 안에 자리해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을 받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약간 비껴서 찾아간 곳은 동국사(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 동국사라는 절집 또한 특이하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사찰은 많았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이 곳 월명산 동국사가 유일하다.
한마디로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절집이다. 전형적인 일본양식이고, 복도를 통해 법당과 화장실, 목욕탕으로 모두 이어지는 것이 특이하다. 모든 문은 다다미식으로 돼 있다. 마당에 있는 범종 앞에 있는 돌석각의 얼굴도 여느 절집에서 보는 것하고는 얼굴 모습이 다르다. 절집 뒤켠에 있는 대나무도 일본식이다. 이파리가 길지 않고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다르다. 근처에는 아직도 일본 식 가옥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구 히로쓰(廣津) 가옥(군산시 신흥동)은 일제강점기 군산지역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식 가옥. 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자리를 비껴 이영춘 가옥(군산시 개정동)을 찾아 나선다. 간호학교 내에 있는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때 전국최대의 농장주인 구마모토(熊本)에 의하여 1920년대에 건축 됐다고 한다.
당시 건축비가 조선총독부의 관저와 비슷하게 소요됐다고 할 만큼 고급자재를 사용했다는 이 집은 외관에서는 지금도 유행에 뒤지지 않은 형태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농장주들에 의한 토지수탈의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雙泉) 이영춘(李永春)박사(1903-1980)가 이용했다는 의료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길을 다시 떠난다. 일본식 잔재 말고 또다른 문화유적지는 없는 것인가? 팸플릿 지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개정면 발산리. 이곳에는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가 있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소야가 농장의 각종서류 및 현금, 한국에서 수집한 고 미술품 등을 보관하던 장소로 쓰였다.
시마따니는 우리민족의 문화재 수집에 관심을 갖고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과 발산리 오층석탑(보물 제276호)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품을 불법 수집하였던 인물. 일제에 의한 우리문화재 약탈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인데, 한국전쟁 때에는 군산에 주둔한 인민군들이 옥구지역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보물들은 발산초등학교 건물 뒤켠에 모여 있다.
원래 이 석탑과 석등은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 터에 있던 것들. 시마따니가 갈취한 것들이다. 잠시 생각한다. 이제 그 절터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가 있다. 최호 장군은 정유재란(1597)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 전사한 명장. 가만히 연계해보니 거제도 칠천도에서 원균이 왜군과 싸우다 대패한 그 전투다.
어쨌든 군산에는 일제의 잔재가 구석구석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군산은 수많은 강제징용자분들의 눈물이 서려 있고, 넓은 호남평야에서 나온 쌀 수탈의 중심이였다. 곳곳에 일본잔재가 즐비하다.
현재도 일본식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지명이야 개칭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건물까지 나몰라라 하고 방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어차피 역사는 뒤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 건물 또한 우리를 수탈해서 지은 것이므로, 당연히 우리 것이다. 비굴했던 역사의 흔적을 거부하기보다는 이왕지사 잘 보존해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번 더 마음다짐을 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 조형물들이 오래전 역사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 보는 학습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 외 군산 은파유원지는 봄철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호수를 에둘러 6km의 순환도로가 나 있어 시민들의 멋진 산책로로 활용되는데, 밤이면 은빛물빛다리에서 빛이 난다. 그 외에도 임피역사(임피면 술산리)도 가볼만하다.

■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북군산 나들목으로 나와 27번 국도와 만나면서 좌우로 찾아다니면 된다.

■ 맛집과 숙박
계곡가든 내고향 꽃게장(063-453-0608, 계정면 아동리)이 괜찮고 선유도 유람선이 운항되는 주변에는 군산횟집, 장춘횟집(063-443-5161), 충남횟집(063-443-4860)을 비롯하여 수산물 센터가 있다. 그 외에도 군산복집(063-446-0118, 월명동, 아구찜), 완주옥(063-445-2644, 떡갈비, 갈비탕) 등이 소문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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