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의 피닉스는 세계 유수한 기업들이 있지만 모토로라가한 때 22개의 공장을 운영해 가히 모토로라 시티라 할 만하다. 스카이 하버 공항에 착륙하기 전 선회하는 비행기 창 아래로 본 아름다운 주택들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정원과 수영장이 딸려 있다. 그러나 이곳도 곧 퇴색될 전망이다. 얼마 전 그곳에서 만난 택시 기사에 의하면 모토로라의 공장이 16개로 줄고 추가로 이전해 나간다면서 표정이 어두웠다.
모토로라는 카 라디오, TV, 반도체, 휴대폰 등 산업계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적절한 변신으로 업계를 선도해 한 때 최우량 기업의 대명사 중 하나였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모기업이기도 했던 이 회사가 쇠락한 이면에는 창업주 3세로 경영부진의 책임을 지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크리스 갤빈 회장의 경영능력 탓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의 위상이 달라진 데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약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미국 기업은 산업계의 체질변화를 통해 일본, 한국과 멕시코로부터 끝도 없이 밀려온 수입품에서도 살아남았다. 미국 제조업체의 37%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역시 80년대와 90년대의 파고에도 거뜬히 생존했다. 생존 비결은 그들의 사업분야가 대부분 기술과 투자 그리고 고객과의 접근성에서 개발도상국의 기업들을 앞질렀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물론 선진국에 막 진입한 우리나라 식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선진공업국들이 지식 집약적 산업 (knowledge-intensive industries)에서 계속 우위를 점하고 중국 같은 개발도상국은 기술수준이 낮은 부문에 치중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도식은, 그러나 이미 깨진 지 오래다.
미국의 어느 중견 제조업체 V사의 사장은 지난 10년간 공장 자동화와 각종 원가절감을 통해 생산성을 5배나 향상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매출은 줄고 직원수도 줄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중국이 원자재 구입 비용 보다도 싼 가격으로 미국 시장에 제품을 무차별적으로 공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실상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제조업의 공동화 속도가 미국보다도 빠르다. 며칠 전 만난 한 중견 자동차 전장업체의 부사장은 독일의 어느 다국적 대기업이 같은 제품을 40%나 인하하는 바람에 가격경쟁을 할 수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인천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고교시절의 친구를 연초에 만났다. 중국에 공장을 가지고 있어 일 년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낸다는 그도 급성장하는 중국경제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 있는 직원 50명의 인건비가 중국에 있는 450명의 인건비보다 많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그렇다고 중국이 기술이 없는 나라도 아니다. 인공위성을 쏘고 매년 대학에서 배출되는 엔지니어가 25만 명이나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는 이공계의 자부심이라던 서울공대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고육책으로 인기 연예인을 동원해 행사를 치른 촌극까지 TV 뉴스에 방영되는 실정이다.
그가 털어놓은 또 다른 고민은 공장부지가 턱없이 비싼데다 아직도 많기만 한 각종 인허가 때문에 공장을 증설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인건비를 포함한 각종 비용의 상승까지 겹쳐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차라리 공장 부지와 기계를 팔고 임대 수익 등으로 골프나 치면서 편하게 사는 게 낫지 않느냐고 짐짓 떠 보았더니 손사래를 쳤다. 부동산 투자하면 쉽게 돈 버는 줄 알면서도 ‘기계장이’ 들은 바보 같지만 계속 기계를 사게 된다고 했다. 거창하게 산업보국이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어 기업을 계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각종 보도만을 통해 보면 현저히 개선됐다고 생각하겠지만 중소기업들이 느끼는 체감 상생 지수는 아직 엄동설한이다. 모임에서 만나면 “아직도 S사와 거래합니까”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일부 대기업은 자신들이 그 과실을 다 차지한다고 한다. 초원이 없어지면 초식동물이 사라지고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덩치 큰 육식동물의 운명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 늦기 전에 구호나 홍보용이 아닌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진정한 상생협력만이 공멸을 막고 중국 공포 (China scare)를 극복하는 길이다.

김광훈
ASE Korea 품질혁신본부 선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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