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일상을 정지시켜 놓고 마음을 비워 두는 연습이 필요하다. 무념(無念)상태로 하루를 보내버리길 여러 날. 문득,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여백’이 주는 교훈이다. 무기력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찾아간 정선 민둥산 억새군락지. 하루 전, 민둥산 근처의 마을, 증산역전을 배회하면서 그곳의 정취를 느껴본다. 인근에 카지노장이 생기면서 증산-사북-고한의 탄광촌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산행전야의 추억

산을 탈 때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전에 산행을 하는 것이 사람을 지치지 않게 한다. 증산이라는 자그마한 소읍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한다. 증산에는 민둥산(1,118m)을 찾은 것 이외에도 추억 한 페이지가 그려져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식당 여주인과 그녀의 친구들은 필자와 비슷한 나이 하나만으로 한때 가까운 친구가 됐고, 그녀의 생활지였다는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다. 오로지 남아 있는 기억은 허름한 충주식당(033-591-2175)이라는 곳에서 질기디 질긴 곱창에 소주 한잔을 기울인 것뿐이다. 그럼에도 문득 그 당시의 추억이 떠오른다.
비좁은 충주식당에 어렵사리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예외적으로 1인분 곱창을 시켜놓고 마신 소주 한 잔의 취기 탓은 아닐 것이다. 곱창은 여전히 질깃했지만 갖은 야채와 참기름 듬뿍 넣고 비벼주는 밥 한 그릇은 추억을 핑계 삼아 술잔을 기울이게 만든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마시지 말아야 할 술잔을 기울이면서 잠시 그녀를 떠올렸고, 전화를 걸었고, 지금 갖지 못한 몇 년 전의 추억을 아름답게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증산에 있는 엘 카지노 불가마(033-592-8222, 입장료 : 8,000원)가 있었기에 편안했던 것도 작용된다. 카지노장이 생기면서 우선 변하는 것은 주변의 건축물들.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식당, 호텔 등이 돈을 벌려고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24시 찜질방은 나름대로 호텔이라는 이름에 맞추려는 듯 건축자재가 여느 곳과 다르게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아침에 찜질방에서 눈을 떴을 때는 꽤 많은 남정네들이 널브러져 잠을 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는 민둥산 산행을, 일부는 카지노장을 목적 했음직하다. 조식은 호텔에서 황태해장국을 먹었는데, 채로 썬 무가 듬뿍 들어간 국물이 꽤 시원하다.
드디어 민둥산 산행이다. 어차피 한번 가본 곳이니 이미 마음속으로 시간 계산은 다 돼 있다. 해발 800여m 발구덕까지 차를 이동할 수 있고 그곳에서 30여분만 오르면 되는, 반나절만 오르면 되는 거리. 그래서 충분히 아침을 든든히 채운 사람이라면 도시락보다는 물 한 병 준비해도 충분한 산행길이다.

민둥산의 갈대축제

길기도 한 축제(9월 23일-11월 12일) 때문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차량 이동이 가능한 구간은 입구부터 통제를 하고 있다. 이곳부터 걸으면 꽤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하지만 찾는 이가 많을 때는 모든 차량을 오를 수 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통제를 하지 않은 새벽을 겨냥하면 가능할 일이다.
하튼 그렇게 발구덕에 다다르면 산정에는 억새군락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억새군락지의 뒤쪽의 모습, 머리의 뒷모습이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억새 키는 작고, 수량도 많지 않은 길이다. 고랭지 채소밭의 밭둑을 지나 올라가면 이내 활엽수 등산길이 나서고 정상에 다다를 즈음에는 찾는 이 많아지면서 나무 계단 길을 만들어 놓았으며, 그 길을 오르면 정상을 향하는 능선길이 나선다. 1천고지가 넘는 산이라서 다소 숨 가쁨이 있어 오를 때는 힘겹지만 돌아오고 나서는 짧은 거리여서인지 힘겨움은 느껴지지 않은 그런 산이다.
정상에 있던 원두막 같은 조형물은 사라지고 나무판대기를 원형으로 설치해서 전망대 구실을 하게 했다. 발밑으로 제법 넓은 억새군락지가 펼쳐진다. 축제도 하고, 달집태우기도 하면서 가꿔놓은 억새꽃대는 꽤 많이 자라있다. 이곳은 경기 포천의 명성산, 전남 장흥의 천관산, 경남 밀양의 사자평과 함께 한반도 4대 억새 군락지로 꼽힌다. 많은 사람들이 민둥산 억새군락지를 바라보며 하냥 즐거운 가을을 맞이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전국 각지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민둥머리 꼭대기의 한없이 넓은 억새평원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증산. 그곳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해갈까?

■대중 교통편: 민둥산은 청량리에서 태백선 열차 이용해 증산 역에 하차해 가는 것도 좋다.
■자가운전: 영동고속도로 진부IC-59번국도-나전-42번국도(9.4km)-정선읍-남면 삼거리에서 우회전-38번국도-증산읍. 민둥산을 최단으로 등산할 수 있는 코스는 발구덕마을에서 올라가면 된다. 증산에서 굴다리를 넘어서 증산초등학교 지나면 능전 마을이 나온다. 이 곳에 팻말이 있다. 팻말 따라 산 중턱까지 가서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기타 별미집
내고향산천(033-591-5088)은 감자탕과 오리구이가 있으며 장수식당(033-591-1597, 자목골(무릉3리))에서는 토종 황기 닭이 있다. 팻말 하나 없는 시골마을에 있는 토종닭집은 감자를 삶아 호박잎과 된장에 싸 먹는 것이 특징인데, 필히 예약해야 한다. 숙박은 잘 지어놓은 모텔이 많으며 찜질방을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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