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벚꽃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아름답게 핀 꽃을 시기라도 하듯 우렁차게 땅에 비를 쏟아 붓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해지기전부터 막히기 시작해 움직일 줄 모르고 파김치가 된 몸을 더욱 지치게 했다. 예상에 없던 전주 나들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전주에 발을 내딛으면서 다시 직업병이 도졌고 이내 전주에 유명한 막걸리 골목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을 가르면서, 나들목에서 극과 극인 삼천동 일원을 찾아 야심한 밤을 한참이나 배회했다.

습한 대기는 막걸리의 고리탑탑한 냄새를 더 역하게 풍겨내고, 술 취한 취객들은 빗속을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쏘다니고 있다. ‘정적’이라고 느꼈던 전주에서도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온다. 안주 없이 한주전자에 1만원한다는 막걸리 집에 앉아 도저히 여자 혼자 술 마실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거나하게 취한 손님상을 힐끔거리면서 안주가 어떻게 차려지나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취객들은 시비부터 걸어온다. 그래서 술집 기행을 하려면 저녁 늦게 가봐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어쩌면 해질녘 시간이었으면 전주 막걸리 골목에 대해서 좋은 생각으로 마무리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과 같이 취해 있었을 테니 말이다.
다시 차를 돌려 고속도로로 올렸지만 야심한 시간에도 교통체증이 심하다. 겨우 한 블럭을 지난 곳이 익산나들목이다.
미륵사지와 인접한 금마면 소읍의 백제파크장(063-836-8897)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을 달려가고 있었다. 건물은 오래된 듯한데, 실내는 깔끔하다. 빗소리가 양철 위를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이른 아침 미륵사지를 찾았다. 2~3년 전부터 미륵사 서석탑을 복원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공사 중이다. 몰래 공사현장으로 들어섰는데, 해체된 바윗돌에 자그마한 조각 이름을 붙여놓았다. 얼핏 보니 기단부만 쌓아두고 있다. 과연 해체된 바윗돌을 제대로 맞출 수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생긴다. 백제시절 무왕의 화려한 시절을 대변해주는 것들은 왕궁리 일원에 많이 흩어져 있다. 복원보다는 차라리 옛 번성도 이렇게 한낮의 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역사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오전 9시경 미륵산 순두부집(063-835-7400)에서 요기를 했다. 순두부나 막 무친 김치가 예전 같진 않지만 그런대로 한 끼 채울 만 하다. 근처에 있는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289호), 고도리 석불입상, 연동리에 있는 백제 시대 석불좌상(보물 제45호), 무왕의 아들 탯자리가 묻혀 있다는 태봉사 등을 뒤로 하고 익산시내로 나왔다. 비에 젖은 도심의 건물은 땟국물처럼 얼룩져 지저분해 보이지만 군데군데 만나는 벚꽃길이 반갑다. 노란 개나리와 비에 젖은 벚꽃이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지난 77년 이리역 대형 폭파사건이 났을 때 필자는 어렸다.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이야기를 되새기며 익산역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익산역은 폭파 사건 이후 무궁하게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철로는 많았고, 넓었다. 역사를 환하게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홍벚꽃이 활짝 펴 미소를 보낸다. 기차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오고감을 보게 됐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필자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묻지도 않은 역전 주변의 홍등가 얘기까지 전해준다. 이 폭파사건이 있었던 날 고 코미디언 이주일이 화춘화를 구해준 사건이라는 것도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알게 된 내용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익산 서부 쪽인 웅포나루쪽으로 가지 못하고 고속도로 진입로와 인접해 있는 보석테마 관광지(063-850-4981-2)를 찾다가 무심결에 개울 건너 벚꽃 길을 만나게 된다. 벚꽃길이 끝나는 지점에 한옥건물이 보인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까? 그저 꽃이 지고나면 무심결로 지나쳐버릴 그곳에, 벚꽃이 피어나면서 눈길을 잡아끌게 한 것이다. 우선 박물관 주변을 한바퀴 빙 돌았다. 뒤켠에 잘 만들어 놓은 공원이 있고 양편에 시누대길 사이로도 새로 지은 듯한 누각이 보인다. 안쪽으로는 저수지길이 이어진다. 내려오는 길에 건물안쪽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이렇다할 팻말하나 없다. 이곳은 1920년대 왕궁 저수지 완공기념으로 만들어 놓은 한벽정(지방문화재 자료 127호)이라는데, 새로 복원했다는 정보다. 80여년의 세월동안 이렇게 큰 벚나무가 됐을까? 여하튼 하늘을 수놓은 벚꽃은 그 어느 곳에서 본 것보다 감흥이다.
이내 서동요 촬영지 세트장(여산면 원수리 상양마을)을 찾는다. 이제는 드라마 세트장에 대한 관심은 식어가고 있다. 급한 유행처럼 번져가기에 식상해진 것이다. 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저수지를 지나고 마을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올라가서야 세트장을 만날 수 있다. 관광객을 염두에 둔 듯 제법 잘 지어놓은 세트장. 그러나 단 한편도 드라마를 보지 못해 그저 껍데기만 보고 올 뿐. 차라리 인근에 가람 이병기 생가(원수리 진사동)를 찾는 게 더 의미가 있었을 듯하다. 그렇게 익산을 빠져나왔는데도 장대비는 여전하다. 특별히 볼 것 없는 익산여행이지만 또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드나드는 사람이 적어서인지 음식점들이 값싸고 맛이 좋기 때문이다.
■대중 교통 정보=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KTX가 주중 17대(주말 19대)가 있다. 2시간정도 소요. 익산역 앞에서는 64번, 73번, 74-1, 78번, 555번 시내버스가 보석박물관까지 운행. 서동요 세트장:61번, 62번, 63번 222번 이용.
■기타 추천 맛집=박물관 주변으로는 시골밥상(063-834-5457)이 있다. 시내에서는 남부아구탕(063-842-1989)이 가격대비 맛있는 집이다. 곰개나루터에서는 봄철에는 웅어회가 제철. 금강식당(063-862-7000)이 괜찮다.
■시간이 더 많은 사람들이라면=서쪽으로 가면 곰개나루터가 있던 웅포 마을을 만나게 된다. 입점리 고분 전시관(063-850-4995), 숭림사도 괜찮다. 웅포대교를 건너면 서천 신성리 갈대밭(JSA 촬영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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